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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Sep 02. 2024

#6. 와이파이 신호가 강할수록  인간관계는 약해진다.

하이데거의 '세계로부터의 소외'

하이데거의 '세계로부터의 소외'




아침이든, 저녁이든 산책 중에 만나는 풍경과 스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산책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대체로 아이들은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노천카페나 식당, 또는 어느 곳이든 엉덩이를 붙일만한 자리가 있다면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내든다. 심지어 그랩 기사들은 오토바이 위에 누운 자세로 핸드폰 삼매경이다.

나는 오늘도 잔디와 함께 천천히 동네를 걷고 있다.

아내는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산책을 꺼리고, 아들은 힘들다며 산책을 외면한다.

잔디가 옆에 있긴 하지만 산책 중에 우린 서로 절대 대화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

해가 질 무렵의 산책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쓸쓸한 느낌이 가슴에 불어오는 날도 있다.

혼자라는 느낌이 든다.  어차피 인생은 독고다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싼 무인도에 홀로 고립된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도시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군중 속의 고독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할 수 있을까?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 소개된 일화를 보고 나는 인간이 얼마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인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책에 나온 일화를 옮겨본다.

 ‘뉴욕 맨해튼,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군중 속에서도 고독은 커진다고 했던가. 2011년 가울, 이곳에 살고 있던 제프 렉스데일이라는 39세 남자는 여자친구과 헤어진 뒤로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던 그는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노란 종이 한 장에 자기 전화번호와 간단한 문장 하나를 적에 맨해튼 곳곳에 붙인 것이다.

 ‘뭐든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제에게 전화하세요. 외로운 제프.’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 몇 명의 대화 상대라도 생기길 바라던 그에게 실제 연락을 한 사람은 무려 7만 명. 뉴욕은 물론 영국, 캐나다,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심지어 한국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제프를 찾았다. 자신도 외롭다는 하소연과 함께 힘내라는 응원 메시지도 줄을 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이다.


나는 마지막 문장에서 뭔가에 얻어 맞은듯 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이라고?

아침에 눈을 뜰 때 부터 잠에 들때까지 우리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서 고립되어 있으며, 겉으로 외롭다고 외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조차 거대한 외로움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다는 말안가.

그래서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떨거나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스마트폰에 매몰되는 것은 아닐까?

고독. 그렇다. 이 단어는 듣기만 해도 왠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든다.

가능하다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어디든 연결되어 있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고립이나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고독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들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고립감을 느끼는 걸까?

옆에서 냄새 맡기에 집중하고 있는 잔디를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엄마와 떨어진 채 우리 가족이 되었다.

잔디야 말로 완전한 고립과 외로움의 대명사가 아닐까?

하지만 잔디는 그런 것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듯 여기저기 코를 킁킁대며 냄새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간식이나 하나 더 주면 안되겠냐는 표정이다.

잔디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두고 나는 다시 백일몽 같은 사색에 빠진다.  


나는 오랜만에 집에서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려고 TV를 켰는데, 갑자기 화면이 멈추고 "연결 오류"라는 메시지가 뜬다.

당황스럽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어제까지 멀짱하던 TV가 문제를 일으켰다.

이 상황에서 느끼는 좌절감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잠시만, 여기에 또 다른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이 거대하고 심각한 문제를 대면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 고객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객 상담센터 직원들은 이미 퇴근해 버렸으니 내일 다시 연락하라는 음성 메시지가 반복된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열어 인터넷 대형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질문을 쏟아붓고 해결책을 알아본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에서 알려준 대로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포기가 빠르면 절망도 빨리 종료된다.

오히려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조용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숫가에서 얻은 깨달음을 떠올려본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고립된 생활을 선택했고, 그곳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다.

나도 스트리밍 서비스가 고장 난 덕분에, TV를 껐다.

문득 고요함 속에서 자신과 마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오늘은 건너뛰려 했던 산책을 나가보기로 한다.

비록 의도치 않은 고립이었지만, 그 덕분에 진정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제 반대로 생각해 보자. 집에 와이파이가 끊기지 않고, 신호가 완벽한 상태라고 상상해 보자.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우리는 친구들과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고, 소셜 미디어에서 좋아요를 누르며, 수백 개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튜브나 틱톡을 10분만 보겠다며 핸드폰을 열었지만 AI의 사악한 알고리즘은 당신의 호기심을 결코 놔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10분이 한 시간이 되는 건 문제도 아니다.

어쩌면 2시간 이상 우리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컨텐츠의 고리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 SNS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SNS에서 '좋아요.'를 클릭할 때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심을 키우고, 타인의 불행함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내가 저런 상황에 빠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낀다.

잘 지내느냐는 물음에 친구들은 SNS에 최근에 구입한 멋진 자동차나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맛집에서 우아하게 식사하는 사진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친구의 얼굴이 아니라 멋진 자동차와 값비싼 옷이다.

차와 옷이 얼마짜리이고 어떤 기능들이 있는지 궁금하지 정작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내면이나 감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


기분 좋은 아침은 아주 드물지만 기적같이 간혹 그런 날도 있다.  

이런 아침에는 거울을 볼 때 만족스러운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스스로 만족할 때 굳이 사진을 찍어 SNS 올리지 않는다.

아침에 사람들과 따뜻한 인사를 할 때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지 않는다.

그저 미소 하나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뭔가 부족할 때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은 아닐까 싶다.

SNS에 사진이나 영상을 올릴 때는 대체로 관심이 필요할 때이며, 이 관심은 사랑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부족할 때 SNS에 사진을 올린다.

하지만 그들이 받는 좋아요에는 진짜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

그 속에는 순수한 좋음의 감정보다는 부러움과 시기가 섞여있기 마련이다.

카·페·인 우울증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대표적인 소셜미디어인 카카오스토리·페이스북·인스타그램의 앞 글자를 따 만든 단어다.

SNS를 통해 본 타인의 삶보다 나의 삶이 초라해 보일 때 겪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우울증을 앓는 것을 뜻한다. 이 카페인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고 한다.

나만 빼고 다들 잘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한편으로 내 처지가 한심스럽다.

그런 마음 상태로 진심이 담긴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화려한 타인의 모습이 사실은 그들의 최고의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매일 매 순간 그런 최고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매일 최고의 순간이 SNS에 올라온다면 그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런 순간들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우리는 행복감에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또 다행히도 우리의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이야기로 하고 우리는 다시 고립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에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우리는 가짜 연결의 시뮬라크라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현대 문명의 기술을 통해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는 그 가상의 연결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수많은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들의 삶을 스크롤하는 동안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며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깊이 있는 대화나 의미 있는 관계는 사라지고 있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는 얕고 일시적일 수 있으며, 이러한 피상적인 연결은 오히려 우리를 더 고립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피상적인 연결 관계를 끊고 고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나의 글에 댓글이 없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솔직히 그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유난히 스마폰 사용이 많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중 있었다.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에 배터리 표시가 빨간색으로 변해서 곧 숨이 멎을 것 같이 화면이 창백해져 있었다.

스마트폰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지막 유언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평소 같으면 스마트폰을 통해 뉴스나 영화를 보거나, 친구와 채팅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배터리가 나가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스마트폰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나만 홀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봐야 하는 현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 상황은 마치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연상시켰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때로는 그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자신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이 꺼지면서 나는 기가 막히게 그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나는 평소에 지나쳤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합정역을 지나 당산 철교 위를 달리는 지하철 차창 밖으로 눈부신 노을과 한강의 풍경이 펼쳐졌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고요함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 경험은 나 자신과의 깊이 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스마트폰 없이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며, 심지어 그 고요함 속에서 더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립은 처음에는 불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연결을 찾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고립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고, 보드리야르가 경고한 현대 문명의 가짜 연결 속에서 오히려 더 큰 고립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그 순간 우리는 진정한 자아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다음에 와이파이가 끊기거나 스마트폰 배터리가 나가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연결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술의 연결 속에서 잃어버린 진정한 소통과 관계를 되찾기 위해 고립의 순간을 경험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더 깊고 의미 있는 삶의 방식과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전구가 방을 환하게 밝히듯 고독한 산책 중에 떠오르는 좋은 사색은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 준다.

사색이 나의 머리를 밝혀주고 있는 동안 전구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얼마짜리 전구인지, 전구가 어떤 과학적 원리로 작동하는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색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거대한 세상 속에 서있는 자신을 느끼며 스치는 사람들과 자연 속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세상과의 연결은 아닐까?

잔디의 몸과 나의 손에 연결되 목줄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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