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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Aug 30. 2024

#5. 누구냐, 너는?

소크라테스의 질문

나는 왜 '나'이고 '너'가 아닌가?


날씨가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아침이다.

이런 날에는 음악과 함께하는 가벼운 산책이 어울린다.

근사하게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를 들으며 걸으면 폼이 날듯 하지만

나는 클래식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없다.

클래식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지식이 필요하다. 아는 만큼 들린다는 말이다.

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나에게 클래식은 그저 무겁고 어려울 뿐이다.

지금 나의 귓속에서 울리는 노래는 나훈아의 테스형이다.

테스형이라니! 처음 노래 제목을 봤을 때 그 형이 누군데 저렇게 애타게 부르나 싶었다.

그렇다. 테스형은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사라진 소크라테스형님이시다.

나는 소리 없이 흥얼거린다. 나 자신을 알라고 하는데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산책을 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은 다양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까? 저 나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내 옆에 잔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별스럽지 않은 질문 속에 항상 나를 괴롭히는 질문은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처럼

'나는 누구인가?'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고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으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마당에 새겨져 있던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종종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인데 뭘 더 알라는 거지?

뭐 이 따위 질문이 다 있나 싶다.

나는 '아무개다.'라고 이름을 던지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인가?  

물론 '조하리의 창'처럼 나는 모르고 다른 사람이 아는 맹목적인 영역과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사회심리학자 팀 윌슨은 '우리는 자신에게도 이방인 같은 낯선 존재'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말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옆에 함께 서있는 잔디가 나를 바라본다.

'배가 부르니 별 생각을 다한다.'는 듯 한심하게 쳐다본다.  


좋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산다는 것은 삶을 의미 있게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나침반과 같다.

좋은 질문이란 궁극적 질문이며 인간에게 궁극적 질문은 사명이자 소명이다.

철학은 종종 우리에게 깊은 성찰과 답을 요구하는 질문들로 우리를 괴롭힌다.

그중에서도 "궁극적 질문"은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왜 살아가고 있는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우주와 신의 본질은 무엇인지와 같은 것들이다.

이 질문들은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질문에 누가 정확한 답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 질문들을 수천 년째 이어오고 있다.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해, 우주와 신에 본질에 대한 질문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런 것들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선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모르면서 어떻게 나의 외부에 있는 질문들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나는 왜 '나'이고 '너'가 아닌가?


인간은 의미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세상에 우연하게 던져진 존재이지만 그것은 멋지고 안락하게 만들어져서 완성된 채 세상에 던져진 의자와는 다르다.

인간은 완성된 형태로 세상에 던져지지 않는다.

부족한 상태로 태어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세상에 던져진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첫 단서가 된다.

이런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의지를 발휘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나 자신에 대한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아 진다.

이렇게 중요한 질문임에도 우리는 이런 궁극적인 질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세상은 궁극적인 질문이 질문으로써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우리는 난해하고 답을 찾기 힘든 질문보다는, 말초신경에 쾌감을 주는 즐거움과 사회양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모든 제도와 사회 양식은 그런 말초적인 쾌락에 지속적으로 머물도록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과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다. 굳이 이 따위 머리 아픈 질문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즐길거리가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는 웃고 있으면서도 공허하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것은 꽤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할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자신의 내부를 살피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외부는 시각이라는 감각에 의해 파악된다. 우리는 시각으로 80% 이상의 정보를 처리한다.

그리고 시각적인 정보에 의해 파악되는 부분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보다는 평평하다고 믿는 오류에 오랫동안 빠져있었던 것이다.

중력과 인력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전부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멋지고 분명하며,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래서 보이는 부분이 실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자. 다시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선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의 존재에 관한 아래 우화를 들어보자.


한 여인이 난치병으로 생사를 헤매고 있을 때 어떤 음성이 들렀다고 한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도시 시장의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에 대하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그러자 목소리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여인은 알 수 없는 음성과 대화 후 병에서 회복하고 삶이 달라졌다고 했다.


우화 속 음성의 주인공은 상당이 집요하다. 숨 막히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어쨌든 다행히도 쿠퍼 부인은 병에서 회복되었다.

하지만 우화의 말미에서도 쿠퍼 부인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는 나타나있지 않다.

쿠퍼부인의 현명한 대답이 있었다면 나에 대한 정의에도 중요한 참고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 나는 나 스스로를 정의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일단 나 자신을 타인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자.

머릿속에 반짝 떠오른 두 가지 요소는 외모와 태도이다.

외모는 분명히 우리를 타인과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분명한 시각적 요소이다.

설령 우리가 쌍둥이라고 할지라도 100% 동일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리 똑같다고 해도 지문까지 똑같지는 않으니까.

그리나 외모는 변한다. 변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나의 외모는 세월에 따라 변하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육체나 외모로 나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외모가 아닌 다른 것에서 나의 본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태도는 어떨까? 사람마다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있다.

그런 사고방식은 어떤 문제상황이나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준다.

대체로 이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은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변덕이 심하게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은 변한다.

'젊어서 좌파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것이고 늙어서 우파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라고 윈스턴 처칠이 말했다.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은 변하기도 하며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치관 같은 것도 있다는 것이다.

러므로 이런 가치관과 사고방식 역시 우리의 본질이라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외모나 태도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 같이 우리를 비추는 그림자일 뿐 우리 자신의 본질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나의 움직이나 행동들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는 되지만 그림자가 나 자신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망했다. 이제 나는 더욱더 혼란에 빠진다.

외모나 태도가 나의 본질이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제자리다.

머리가 아파온다. 

나를 정의하거나 나의 본질을 아는 것은 왜 어려운 것인가? 

왜 메비우스의 띠처럼 늘 원점으로 돌아오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보기로 한다.

가느다란 생각의 실타래가 풀려 나온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언어 없이도 사고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사고의 깊이나 복잡성은 언어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복잡한 사고를 하려면 언어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함정이 있다. 언어로 사고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알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언어로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언어 자체가 가진 한계와 인간 존재의 복잡성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이지만, 종종 제한적이며, 인간의 깊은 내면과 복잡한 정체성을 완전히 담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우리가 이해하고 사고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제한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는 '정(情)'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 단어의 미묘한 감정적 뉘앙스는 언어로 완전히 표현 가기 어렵다. '정(情)'라는 단어 하나도 정의하기 벅찬데 우리는 미운 정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도대체 정이라는 긍정적인 개념에 밉다는 부정적 개념을 포함할 수 있는가? 한국인이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적 정의에 앞서 무의식적으로 이 말에 대한 의미를 간파해 낼 수 있다.

한국어 사용자들에게는 익숙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뭐라 딱 정의하기 애매한 이런 표현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 개념을 언어로 설명할 때는 그 감정의 복잡성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논리적 구조를 통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이긴 하지만, 인간의 감정, 본질적인 자아,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논리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언어가 현실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발생하는 왜곡과 모호함을 강조했다. 즉, 언어는 우리의 내면의 경험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러한 한계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크 데리다 역시 언어가 가진 의미의 모호성과 한계를 강조하며, 언어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고정된 의미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전복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의미의 유동성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려 할 때, 고정된 본질을 발견하기보다는 의미의 끊임없는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

즉, 데리다에 따르면, 언어는 자신을 고정된 실체로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이는 우리가 자신의 본질을 언어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했다.

'자유'라는 단어를 예를 들어보자.

자유라는 단어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당시의 '자유'는 주로 군주제에 대항하는 정치적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자유'는 정치적 의미 외에도 경제적 자유, 개인의 선택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다양한 의미로 확장되었다.

이처럼 '자유'라는 단어는 그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

또한,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도나 해석에 따라, 이 단어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 의미는 또 변할 수 있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언어로 규정된 개념은 절대적이거나 고정된 본질을 지니지 않으며, 사회적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개념인 것이다.



언어라는 도구만으로 우리 자신을 완전히 정의하거나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를 사고의 기반으로 하는 우리는 나에 대해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시도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그런 시도는 희망고문에 가깝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패배주의적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여기서의 포기란 이성적 도구를 잠시 내려놓자는 말이지 자신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어 이상의 도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나는 '안다.' 또는 '이해한다.'가 아니라 '느낀다.'와 '체험한다.'라는 형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언어적인 것도 아니고 사색적인 것도 아니다.

사색 역시 언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체험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무념무상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호흡에 집중하고 그 외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써본다. 쉽지 않다.

다양한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다.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소음,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 그리고 내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내면의 소리는 복잡하고 산만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타인의 생각들은 내 생각을 머릿속 바깥으로 밀어낸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정보가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세상이다. 온갖 정보가 우리에게 수렴되지만,

그것을 비판하고 반론하며 사색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으로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유튜브나 온갖 SN, 포털에 널린 영상이나 기사들을 나의 생각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체화되지 않은 이런 정보는 그저 씹지 않고 음식을 삼키는 것과 같다.

나는 이 불청객들 쫓아내려 고개를 흔든다. 제법 효과가 있다.

그때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아주 잠시지만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 바람 그 자체를 느끼고 있었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평안함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일부가 된 것 같기도 하고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한 조각이 된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이것을 체험이라고 확신했다.


언어는 본질을 그 자체에서 분리시킨다.

언어로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본질에서 분리가 된다.

본질이 아니니 설명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도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려면 오로지 나 자신에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회적 관념이나 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여타 철학자들이 그랬든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듯이, 디오게네스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에게 어떤 소원도 들어주겠다는 말에 단지 "내 햇빛을 가리지 말라"라고 말했듯이, 토리노에서 한 마부가 말을 때리자 니체가 달려가 그 말에 매달려 눈물을 흘렸듯이.

우리의 의지대로 살아가야 한다. 정성스레 살아가야 한다. 무엇을 입증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기를, 세상을 다른 식으로 바라보기를. 그것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고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칼 세이건은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도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가 나를 가장 명백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어떤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나를 가장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알려고 하고 (그게 자기 자신일지라도) 이해하려 하고, 설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산책의 목적은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내는 데 있다.

모든 이치가 그렇다.

커피나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것을 한 잔 마셔보는 것이 더 생생하고, 살아있으며, 적용 가능한 지혜가 된다.

그러니까 나를 알기 위해서 애쓰기보다 나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아내는 것이 나의 본질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를 돌아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집중하며 나만의 원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타인과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마지막 순간 나답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답게 살았다는 것이 나에 대한 앎이며 정의가 아닐까.


잔디가 이제 그만 생각하고 집에 가자며 나를 끌어대고 있었다.



* 조하리의 창(Johari Window)은 심리학에서 개인의 대인관계와 자기 인식을 이해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다. 이 모델은 1955년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Joseph Luft)와 해리 인검(Harry Ingham)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조하리"라는 이름이 붙였다. 조하리의 창은 개인의 자기 인식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정보를 어떻게 공유하고 인식하는지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네 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시장의 흐름이 보이는 경제 법칙 101


활용법

먼저 어떤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형용사를 생각해 보자. 잠깐만 생각해 봐도 확신에 찬, 행복한, 동정하는, 현명한, 성숙한, 의존적인, 아는 것이 많은, 수줍은 등 상당히 많다. 조하리의 창 이론의 개발자들은 앞서 언급한 형용사를 포함하여 57개의 형용사를 제시했다. 우선 57개 형용사 중에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형용사를 6개 선정한다. 그런 다음에 자신에 대해 좀 아는 주위의 다른 사람도 6개를 선정할 수 있게 한다. 그다음 자신과 다른 사람이 선정한 단어를 놓고, 분류하는 작업을 해본다. 서로 겹치는 단어는 모두가 아는 ‘열린 창 박스’에 넣는다. 자신은 골랐는데 타인은 선택하지 않은 단어는 ‘숨겨진 창’에 넣는다. 또 타인은 골랐는데 자신은 선택하지 않은 단어가 있다면 ‘보이지 않는 창’에 넣는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선택하지 않은 단어는 ‘미지의 창’에 넣는다.


이제 분류된 단어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공감대를 넓히고, 관계를 더 좋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을 각자 찾아본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숨겨진 창에 있는 자신의 특성을 타인에게 조금씩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이런 특성을 공개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판단에 따르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특성을 타인에게 알려준다면 서로를 좀 더 잘 알게 되어서 직장에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타인은 아는데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 즉 보이지 않는 창에 주목해 본다. ‘아, 나에게 이런 특성이 있었는데, 정작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혹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은 나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고,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가능성 있는 부분으로 생각하면 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 같다면 아예 포기해도 좋다. 조금만 노력하면 될 것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정진하면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된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57개 형용사를 가지고 직접 테스트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자신이 선택한 6개의 형용사, 그리고 타인이 선택한 6개의 형용사를 2 ×2 매트릭스의 조하리 창에 집어넣어 보기 바란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그 해답을 조하리 창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4개의 창으로 상대방과의 관계를 가늠한다 - 조하리의 창 이론


* 57개 형용사

able

ambivert

accepting

adaptable

bold

calm

caring

cheerful

clever

congenial

complex

confident

dependable

dignified

energetic

extrovert

friendly

giving

happy

helpful

idealistic

independent

ingenious

intelligent

introvert

kind

knowledgeable

logical

loving

mature

modest

nervous

observant

optimistic

organized

patient

powerful

proud

aggressive

reflective

relaxed

religious

responsive

searching

self-assertive

self-conscious

sensible

sentimental

shy

silly

smart

spontaneous

sympathetic

tense

trustworthy

warm

w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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