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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Sep 06. 2024

#7. 이번 생은 틀렸어.

니체의 영원회귀

신이 묻는다. '넌 왜 너 자신처럼 살지 않았으냐?'


평일날 아침 산책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아침형 인간이라도 평일 아침은 분주하기 마련이다.

출근이라는 제약조건이 따르면 마음은 훨씬 더 조급해진다.

그런 조급한 마음 상태로 산책에 나가면 분명 쫓기듯 허둥지둥 걷다가 돌아올게 분명하다.

그래서 평일에는 보통 저녁 식사 후 소화라도 할겸 하루를 정리하기 위한 산책이 적당하다.

도시 중심가의 저녁은 아침만큼이나 활기차다. 물론 중심가를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잔잔한 미풍에 흔들리는 가로수가 만드는 그림자들의 왈츠가 걷기를 유혹한다.

한낮의 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불어온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행복의 순간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문득 드는 어두운 생각이 든다.

반대로 회사에서 키우는 사축으로 삶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등줄기가 싸늘해진다.


어쨌든 이번 생에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적인 삶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 같다.

좀 더 젊다면 뭐라도 해볼텐데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을 돌린다고 한들 특별히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오늘 나는 산책을 하며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어떨까하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 생각의 발동이 걸렸다. 물론 그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나의 머리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싫어한다.

영원회귀의 모순을 밝히려는 글들도 읽어보고 니체와 불교 사상의 구조적인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하지만 역시나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뭔가 이해하기 힘든 생각들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

철학은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나의 철학은 좀 더 단순하고 간단한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쉽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니체의 생각에 따라 잔디가 영원히 개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다분히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잔디에게 사람으로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일러주듯 서글픈 시선으로 쳐다 보았다.

잔디는 그런 내 눈빛을 무시하고 그런 골치 아픈 생각 따윈 개나 줘버리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번 생은 틀렸다, 이번 생에 난 부자가 되긴 글렀고 이번 생은 죽었다 깨나도 대기업에 입사하긴 틀렸어. 이번 생은 결혼조차 꿈도 꿀 수 없다. 난 가망이 없어. 먼저 가."


맞다. 평범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고 희망하는 생에 도달할 가망성이 거의 없다.  

대기업 회장님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지도 못했고, 엄마가 늘 부러워하는 엄친아로 태어나지도 못했다.

조각상같은 꽃미남보다는 북한의 꽃제비에 더 가깝고 완벽한 몸매에 여신같은 미모는 고사하고 빠지지 않는 지방덩어리들을 덕지덕지 붙인채 살아가고 있다.  

내 IQ가 150이었다면. 천재 축구선수나 야구선수 같은 재능을 타고 태어났더라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고 행복하지만 상상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초라한 현실에 더욱 실망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을 향해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이번 생은 틀렸어.' 라고.


그나마 우리에게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로또 뿐인데 이마저도 신은 우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만 같다.맞다. 그렇다. 우리는 불운의 아이콘 그 자체다.

어쩔수 없는 안타까운 이 현실에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한번 끼워 넣어보자. 

만약 지금 이 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어떨까?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의 기쁨과 고통, 성공과 실패가 영원히 반복된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영원히 반복될 이 삶이 나에게 고통스럽다면 나는 현재를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단순히 같은 순간이나, 생의 반복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에 초점이 맞춰있는 것도 아니다.

난 모르겠고, 일단 문자 그대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가정하기로 한다.

전에 말했듯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고 타인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게 대철학자 니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불교의 윤회 신앙도 떠올려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 현재의 삶에서 쌓은 업이 다음 생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 생을 끝내면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삶이 다음 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무한히 반복되는 동일한 삶을 제시하며, 우리가 지금 선택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한편, 윤회는 우리가 이번 생에서 쌓은 업에 따라 다음 생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 두 개념은 우리에게 현재의 삶을 더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내가 이번 생을 마치고 나서 다시 태어날 때, 혹은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될 때, 과연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원회귀와 윤회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순간, 우리는 비참해지고 만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나 자신으로서 사랑할 수 있다면, 영원히 반복되는 삶도,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삶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며 "이것이 성공이다.",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영원히 반복될 삶 속에서, 우리는 누구의 기준이 아닌, 나 자신의 기준으로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윤회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나 자신으로서 살았던 그 삶이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 고민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해도, 그 순간이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타인이 아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영원회귀와 윤회의 개념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넌 왜 너 자신처럼 살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인도의 신분제도는 사회를 네 가지 주요 카스트로 나누는데,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야(관리자 및 군인), 바이샤(상인 및 농부), 슈드라(일반 노동자)로 구분된다.

이러한 신분체계는 출생하는 순간 부모의 신분에 따라 빼도 박도 못할 운명으로 결정되며,

아무리 노력해도 결정된 신분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러니 애써 힘빼지 말고 현실에 순응하며 열심히 살아서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인도의 종교적 신념 중 하나는 '삼사라'라고 불리는 사이클이 있다.

한마디로 이해하기 쉽게 윤회라고 보면 된다.

이번 생이 끝나면 살아온 삶의 업덕에 따라 다음 생에 다른 신분의 존재로 태어난다는 신앙이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세계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가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우리들 앞에 있는 축생, 예를 들어 파리나 모기 등도 전생에는 인간이었던 것이 바뀌어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또 장차 우리들이 다음 생에서 파리나 모기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총체인 업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다음 생을 꿈꾼다 한들 우리의 살아왔던 과거의 행실을 돌아보면 파리나 모기로 태어날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 지기도 한다. 바퀴벌레를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바퀴벌레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음식물에 빠져 때깔 좋은 얼굴로 저승길에 오르거나, 재수없다면

파리채나 에프킬러 한방에 다시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또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일단 현재 상태를 인정하고 다시 한번 생각의 보따리를 펼쳐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번 생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지을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우리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할 때가 아닐까 싶다.

내가 재벌집 막내아들 그것도 송중기처럼 얼굴까지 잘생긴 존잘러로 태어났었더라면...

그건 좀 지나친 욕심인듯 하니 조금 눈높이를 낮춰,

그저 엄친아 정도의 스펙이라도 갖춘 존재로 태어났다면...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의 상황과 환경에 대한 열등감과 부러움이 만들어낸 우리의 허황된 비교가 아닐까!

타인에 대한 비교와 타인의 삶을 닮아가려고 애쓰는 우리 모습과 비슷한 아래 우화를 한번 보자.


어린 시절 나는 나 자신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중학교 때 우리 반의 멋쟁이 동수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동수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내고 그의 말투를 따라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고등학교에 가려고 애썼고 마침내 그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동수는 고등학생이 되자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수라는 모범생 주위를 맴돌았고 영수처럼 걸었고 영수처럼 말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는 영수처럼 걷고 말하는 동수처럼 걷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수는 철수처럼 걷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철수는 또 만수처럼 걷고 말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만수처럼 걷고 말하는 철수를 모방하는 영수의 복사판인 동수처럼 걷고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만수는 또 누구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항상 모방했는지 아는가?
바로 민수였다. 어딜가든 내 걸음걸이와 말투를 모방하려고 애쓰는 그 머저리 같은 민수말이다.


만약 영원히 반복될 이 삶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의 그림자만을 쫓고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얼마나 큰 고통일까? 영원회귀나 윤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내가 이번 생을 모방과 비교로만 살아간다면 다음 생에서도 이 패턴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이 되고자 발버둥치는 순간 비참해진다.

그리고 이룰 수 없는 희망고문으로 자포자기 한채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삶을 낭비할 수도 있다.

심지어 진짜 다음 생을 노리고 생명을 담보로 위험천만한 도전을 감행할지도 모른다.


비교하는 행위를 너무 비하한 것 같아 사족을 달아본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복과 만족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신보다 더 나은 성과를 보이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신의 불만족을 증폭시킬 수 있고, 자존감을 저하시킬 수 있다. 이는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우울증과 불안 증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드문 일이지만, 타인보다 나은 상황이나 성과를 보이는 우리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만족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행복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한다.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안도감이라고.


자 그러니 이제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우리 자신의 삶에 만족해 보자. 우리는 끼니를 걱정할 만큼의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옷장에 수많은 옷을 보면서 입을 옷이 없다고 불평할뿐 헐벗고 생활할만큼 어려운 상황에 있지도 않다. 더 가지려는 마음을 내려 놓는다면, 우리는 지금 모습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외모나 외부적 환경에 치우쳐 진정한 자신을 외면하지 말자.

저 세상에 갔을 때 신은 우리에게 "넌 왜 모세처럼 살지 않았는가?"라고 묻지 않으실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넌 왜 너 자신처럼 살지 않았으냐?" 고 물으실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위로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퀴즈를 풀어보자.
아침에는 네발, 점심엔 두발, 저녁엔 세발로 걷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퀴즈라고? 맞다. 정답은 인간이다.
우리 일생은 어쩌면 하루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또 하나의 생이라고 생각해보자.
굳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생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이라는 생이 틀렸다면 내일이라는 생을 잘살아보자.

우리는 매일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양광모 시인의 '내가 나를 업고'  라는 시를 읊으며 다음 생인 내일을 기약하자. 


나 또한

허공에 선 채 흔들리던

그림자에 불과했음을 안다


빛을 등지고

어둠을 헤쳐야할 때

앞장서 이끌었던 것은

언제나 너였나니


짓밟혀도 짓밟혀도

가장 먼저 땅에

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오히려 너였나니


선 그림자,

누운 그림자

일으켜 등에 업는다


생이란 내가 나를 업고

내가 나를 안고

끝까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오늘이라는 생이 틀렸다면 내일이라는 생을 잘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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