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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Sep 09. 2024

#8. 그게 뭔 소리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언어철학

너 그 사과, 정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걷는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다.

나와 세상을 적당한 거리에 두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활동인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심각할 필요는 없다.

뜬금없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산책 중 떠오른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모이면 어느덧 인생 개똥철학의 대가가 될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어쩌면 나도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흐뭇해진다. 뭐, 아니면 말고.


해외에서 산책을 한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나라 말에 휩싸이는 것과 같다.

아니 완전히 파묻히는 기분이다.

온 사방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이다.

몇 마디씩 알아듣는 말이 있지만 생존 외국어 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나에게 현지어는 거의 외계어 수준이다.

그래도 산책하는 데는 전혀 불편함은 없다.

길거리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사거나 길에서 만나는 다른 산책자들의 인사 정도는 받아주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정도는 된다.

때로는 따뜻한 미소 하나로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

간혹 내게 길을 묻는 현지인도 있지만 그럴 땐 그냥 씨익 웃고 있으면 된다. 그럼 대부분 알아서 간다.

이렇게 말이 다른 경우에도 미소하나로 소통이 되는데 서로 같은 언어로 대화하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우리 주위에선 자주 발생한다.

어떤 사람의 말은 고구마 백개쯤 먹은 것처럼 답답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따박따박 맞는 말인데도 대화가 끝나고 나면 마음이 너덜너덜 상처 투성이가 되어 있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주고받은 건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다.


매년 9월 8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해의 날'이다.

읽고 쓰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따로 날을 제정했다는 것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문맹이 있다는 의미이다.

아프리카 등 교육 여건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는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성인 기준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1958년에 문맹률을 4.1%까지 떨어졌고 현재는 0%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실질 문맹률에 관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

'심심한 사과'에서 심심한이라는 단어를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중식 제공'을 중국 음식 제공으로, '우천 시 체육관으로 장소 변경'에서 우천 시를 도시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뭐 사흘에 대해 왜 4일이 아니고 3일인지에 대한 논란도 얼마 전에 인터넷을 휩쓸기도 했고, 이력서 핸드폰란에 아이폰이라고 기재한 청년의 사례도 화재 되기도 했다. 얼핏 읽고 쓰는 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문해력이 낮은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이다.


헷갈리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 사회는 문해력이라는 화두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다.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범람하는 시대, 진짜 정보를 판별하는 능력도 광범위한 의미로 문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산책하면서 ‘문해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렇다. 바로 그 단어. 여러분도 뉴스에서 봤을 것이다.

사람들이 "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착각하고, "우천 시"를 도시 이름으로 오해해서 우천 시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그 웃픈 상황들 말이다.

이쯤 되면 "언어"라는 게 정말 이상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되시겠다.  

이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 그 사과, 정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했다.

쉽게 말해, 내가 알고 이해하는 언어의 범위만큼 내 세상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우리 삶을 이해하는 창문 같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창문이 너무 작으면, 우리 시야도 그만큼 좁아진다. 어쩌면 실질 문맹이란 바로 이런 현상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자.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면, 내가 사용하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데 현대 사회는 모든 걸 너무 빨리 소비한다.

다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 시대를 본다면 당장 스마트폰을 던지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봐! 멈추고, 그 단어를 다시 봐! 심심한 건 너고, 사과는 그렇지 않다고!”라고 말이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이 말은 생각보다 심오하다.

만약 내가 단어 하나를 잘못 해석한다면, 세상 전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에 갇힌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말은 통하는데, 말의 의미는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심심한 사과"를 표현했을 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람과의 소통은 그저 허공 속에 떠도는 말들에 불과할 수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빌려보자.

그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며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말이 현대의 소통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이해하는 듯 보이는 단어들 속에서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실질 문맹이란, 그저 '모르는 척'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의미들을 다시 한번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부재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라면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잘못 해석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뜻을 다시 물어보며 깨달음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모른다는 사실을 오히려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흠, 생각이 점점 더 복잡해지기 전에 다시 걸어보자.

일단 비트겐슈타인이 준 교훈은 이렇게 정리된다.

“단어를 차분히,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보자. 그래야 지루하지 않은 사과를 만나게 될 테니까!”


걷다 보면 문득 스마트폰을 한 두 번 꺼내 들게 된다. 습관처럼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스마트폰! 이 작은 기계 안에는 무수한 정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  

뉴스를 확인하고, 친구와 채팅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오늘 본 떡볶이 사진에 좋아요도 누른다.

좋다. 뭔가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나쁠 리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너무 빨리 소비한다는 것이다.

너무 빠르게 말이다.

대니얼 카너먼의 ‘느리고 깊게 생각하기’라는 개념이 생각난다.

카너먼은 우리 인간의 사고를 두 가지 시스템으로 설명하는데 하나는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 또 하나는 느리고 분석적인 시스템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모두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SNS에서 글 한 줄 읽고 바로 ‘아하, 그렇군.', '아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군.' 하며 사실로 믿어버린다.

"사흘"이 왜 4일이 아니고 3일인지 고민할 시간도 없다. 다음 게시물로 넘어가야 하니 말이다.

이러니 문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카너먼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뭔가 너무 쉽고 빠르게 이해됐다고 느낀다면? 

그건 네 시스템이 너를 속이고 있는 거야. 잠깐 멈추고 생각해 봐! 느리게, 느리게!”

그러니, 오늘부터는 페이스북에서 뉴스를 볼 때 한 템포 쉬어 가보자.

사흘은 4일이 아니다. 그리고, 좋아요 누르기 전에, 진짜 좋아하는지 한 번 더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간혹 글을 발행하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라잇킷이 달리는 걸 보고 '이 말 달리는 속도는 뭐지?' 의아한 적이 있다. 라이킷이 좋긴 하지만 그 보다 좋은 건 글이 전달되고 공감되는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곱씹어 잘 소화한 후에 의미가 있다면 그때 눌러도 늦지 않다. 

짧은 글이지만 나는 글을 쓰는데 최소 6시간 이상이 걸린다. 일수로는 2-3일 정도 걸린다. 

읽는 데는 5-10분이면 충분하니 서둘지 않아도 된다. 


저 멀리 나무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비친다. 

바로 이 순간, 장 자크 루소가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루소는 산책의 열렬한 팬이었다. 뭐, 팬이라기보단 거의 마니아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루소는 자연 속에서 사색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자유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문명사회에서 너무 복잡한 생각을 하느라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자연 속에서 걸으며 사색하라고 권한다.

생각해 보면 문해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진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정보의 바닷속에서 우리는 헤매고 있다.

문해력의 문제는 결국, 너무 많은 정보가 우리 앞에 있고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루소라면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모두들, 잠깐 밖으로 나가서 걸어보세요! 인터넷 꺼두고, 자연 속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세요. 깊이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늘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만 문해력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이렇게 말한다. 

“문해력은 글뿐만 아니라 사람의 감정도 읽는 능력을 포함하는 거야!”

그렇다. 바로 감정적 문해력도 있다는 것이다.

골먼에 따르면, 감정적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적절히 반응할 줄 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감정적 문해력도 떨어지고 있다.

그건 또 왜냐고? 감정은 마주 보고 나누는 건데,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산책하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어색하다.

그건 문제도 아니다. 엘리베이터에 낯선 이와 함께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나처럼 내성적은 사람은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것이다. 

시선을 둘 곳이 없으니 결국 스마트폰을 꺼내 들 수밖에 없다.

감정적 문해력이 부족하면 대화는 오해로 가득 차고, 인간관계는 자꾸 삐걱거리게 된다.  

마치 ‘심심한 사과’를 오해하듯이, 상대방의 속마음을 잘못 읽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오늘 나는 아내와 대화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뉘앙스에 잘못 대답한 죄로 결국 한소리 듣고 말았다.

아내 : "당신은 항상 내 말은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해."
나 : "아니야! 난 당신 말 듣고 있어. 당신이 예민하게 구는 거야."
아내 : "뭐라고??"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피해 서둘러 잔디와 산책길에 올랐다. 나는 여전히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골먼은 나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문해력은 상대방의 표정과 목소리도 읽어내는 능력이야. 그러니까, 고개 좀 들고! 눈을 마주쳐! 감정이 텍스트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마음을 읽으라고?

그렇다. 골먼은 우리에게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 해석도 어려운 세상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변하는 아내의 마음을 읽어내라고 하니 좀 과한 요구가 아닌가.

그래서 골먼뿐만 아니라 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도 이 초능력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해 준다.

그의 소통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언어", 즉 말 그 자체는 겨우 7%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나머지 소통의 93%는 목소리의 톤이 38%, 몸짓이 55%로 비언어적 요소들이 정보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보다는 그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서 훨씬 중요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저 말의 내용에만 신경 쓰느라 진짜 중요한 건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연애 상황에서 연인이 "나 사랑해?"라고 물어본다고 해보자.

이때 상대방이 "사랑해"라고 말은 하지만, 목소리는 자신감 없이 기어들어가고, 눈은 딴 데 보고 있다면?

그 7%의 단어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진짜 중요한 건 93%의 목소리 톤과 몸짓이니까.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의 속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말은 물론이고 어떻게 말하는지도 유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손짓, 표정, 목소리 하나하나가 말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조폭 형님들이 얼굴을 자세히 보는 걸 싫어하는 거다. 

빤히 쳐다보면 '눈 깔아' 한 마디가 바로 날아오기 마련이다.

부끄러운 속내를 들킬까 겁나서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진짜 문해력은 책 속 문장이나 스마트폰 액정 속에 깨알 같은 정보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산책이 중반 지점을 지나 집으로 돌아갈 무렵, 나는 철학자 미셸 푸코를 떠올려 본다.

푸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세상의 정보가 다 진실일까?”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그 자체로 중립적이지 않다고 한다.

모든 정보는 권력관계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 배경을 이해해야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우리가 단순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가 권력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고 해석된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 미디어에서 제공되는 뉴스, 법과 규제, 정신의학, 그리고 얼마 전의 팬데믹 상황까지 모든 정보는 그 자체로 특정한 권력의 의도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보를 접할 때 그 정보의 배경과 목적을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푸코는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우리가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수많은 뉴스를 소비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가짜 뉴스도 많이 섞여 있다.

난 이 문제가 무척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뉴스가 왜 만들어졌는지, 어떤 의도로 퍼지는지를 따져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해력이란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그 정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배경을 파악하는 힘이 필요하다. 푸코라면 아마 이렇게 충고했을 것이다. “자, 당신은 음모론의 홍수 속에 있어. 그 뉴스의 이면에 숨은 권력을 봐! 그저 수용만 하지 말고, 네가 접한 정보의 진짜 의도를 파악해야 해!”


산책이 끝나면 결국 나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문해력도 마찬가지다.

결국 모든 문해력의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얼마나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카너먼이 충고한 대로 느리게 생각하며, 루소처럼 사색을 통해 자신을 찾고, 골먼의 감정적 문해력을 발휘해 사람의 마음을 읽고, 푸코의 권력 이론을 바탕으로 정보를 분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문해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말 한마디, 글 한 문장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늘도 잠시 시간을 내서 걸어보자.

세상도, 사람도, 그리고 문해력도,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음미하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걷다 보면, 답이 보이는 법이다.

아내와 살짝 다투고 도망치듯 산책을 나와버린 나에게도 답이 보인다.

집 앞 꽃집에 들러 꽃 한 송이를 사들고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 오늘의 정답이다.


잔디가 그런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지만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가 없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에게 꽃을 선물하며 아양을 떨어본다.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돈 아깝게 왜 꽃을 사고 난리야!!"

귓속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내 생각이 언제나 정답은 아닌가 보다.


어른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아이들의 말은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른들의 말은 말씀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른들의 말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내가 하는 말이 가치가 있는 말인지 생각해 보는 게 좋다.

한번 짜증 난 아내의 마음은 쉽게 되돌려지지 않는다. 말하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고 쓸모 있는 말을 하자.

그게 거짓말이라도 아내가 기분 좋아질 만한 말 말이다.

문해력이고 뭐고 아내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죄로 오늘 저녁은 라면각이다.


진짜 중요한 건 93%의 목소리 톤과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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