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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Sep 13. 2024

#9. 옷장이 비었다. 내가 산 것은 옷이 아니었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용

남겨진 시간과 마음은 티셔츠보다는 내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고 싶다.




새벽이 밝아오자 어김없이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온 잔디는 산책을 가자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내가 사는 이곳은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는 탓에 산책 복장은 매우 단출하다.

편안한 반바지와 좀 낡았지만 발에 딱맞는 운동화 한 켤레 그리고 뱃살을 가려줄 풍덩한 티셔츠 하나면 충분하다.

물론 잔디는 나보다 더 단출한 복장(?)이다. 이 녀석은 그저 털 하나만 걸치면 충분하니까.

물론 그 털도 귀엽게 잘 차려입은 것 같긴 하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단출한' 패션이다.

대충 세수를 하고 잠옷을 벗고 옷장을 열어본다. 산책 때마다 즐겨 입는 티셔츠를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어깨 쪽이 2cm 정도 찢어져 있다.

'이 티셔츠를 언제 샀더라...' 생각해 봤는데 기억이 잘나질 않는다. 아마도 2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다.

아내는 제발 옷 좀 잘 입으라고 매번 잔소리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옷을 잘 갖춰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옷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가끔이지만 귀찮을 땐 그냥 살짝 찢어진 옷도 입고 나간다.

옷장에 다른 티셔츠가 몇 벌 있지만 좀 작거나 불편한 옷들을 제외하니 입을 만한 옷이 별로 없다.

오늘은 마트에 가서 티셔츠를 한 장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살짝 찢어졌지만 편안한 티셔츠를 입고 아내에게 들켜 또 한소리 들을까 봐 조용히 잔디를 안고 현관문을 나선다.


산책 길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모두들 근사하게 차려입고 어깨에 힘을 꽉 주고 멋들어지게 거리를 걷는다.

복잡한 중심가를 지나가다 보면 화려한 옷차림에 번쩍이는 액세서리로 무장한 사람들이 고급 자동차에서 내려 거리를 활보한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어김없이 그 힘을 발휘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반드시 하는 고민이 철학자도 아닌 내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왜 우리 세상은 이렇게 생겨먹었으며,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가?'

장 보드리야르가 떠오른다 그는 우리 세상의 주류가 된 자본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생산수단, 한마디로 뭔가 쓸모 있고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드는 시스템이다.

이것이 예전에는 왕과 귀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소시민들의 삶에는 많은 것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생산 수단이 왕과 귀족에서 사장님에게 넘어간 후부터 소시민들도 돈만 있으면 내가 누구든, 신분이 어떻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엇이듯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객님이 된 것이다.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어린아이들까지 노동을 시켜서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생산하기 무섭게 모두 팔려 나갔다.

애초에 가진 것이 별로 없던 소시민들에겐 살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것도 사야 하고 저것도 사야 하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엄청난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걸 다 사려면 공장에서 또 죽어라 일을 해야 했다.

일하고 사고, 일하고 사고 이렇게 자본주의는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게 전기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그럼 후기 자본주의의 모습은 어떨까?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결핍이 어느 정도 해소된 후기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옷이 없어 헐벗은사람이나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녀야 하는 절대빈곤의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다. 이제 사람들이 가질만한 건 다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사장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현상인가?

'사장님이 미쳤어요.'라는 옛날 옛적 광고 문구처럼 사장님들의 정신이 혼미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옷장을 열면 옷이 가득하지만 입을 옷이 없다.

그때 마침 백화점에서 세일을 한다. 원 플러스 원이란다.

냉장고를 하나 사면 밥솥을 한 개 거저 준다고 한다.

스마트폰의 약정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기종에 자꾸 눈이 돌아간다.

이미 가지고 있는데, 없는 게 아닌데, 그런데 또 우리는 산다.

이제 사장님은 어떻게 더 많이, 더 빨리 만들지가 아닌 '어떻게 꼬셔야 지금 있는 걸 버리고 또 사게 하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언은, 이제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바뀌었다. 소비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세상이다.

보드리야르는 이제 우리가 사는 상품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가 자꾸만 사는 것, 이것의 본질은 뭘까?

상품의 가치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배 철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와 가격은 노동력과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누군가 백화점에서 멋진 옷 한 벌을 두고 '이거 왜 이렇게 비싸요?'라고 묻는다.

'이건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옷입니다.'

'아하. 그렇다면 비싼 게 이해가 되네요.'

알프리드 마샬은 수요과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아니 이 신발은 왜 이렇게 비싸요?'

'이건 스페셜 에디션으로 전 세계 100켤레만 생산된 거예요.'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것도 이해가 되네요.'

물건은 없는데 살 사람이 많으면 그냥 비싸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주식과 코인 버블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따르면 이것도 다 옛날이야기라고 한다.

우리는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산다는 것이다.

같은 흰색 티셔츠인데 옆가게에서 파는 흰 티셔츠가 비싸도 한참 비싸다. 그래도 그걸 사고 싶다.

왜냐고? 그 흰 티셔츠에 샤넬 로고가 꽉 찍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돈을 지불하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걸 입고 삼선 아디다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명품 티셔츠에는 명품 신발이 어울리는 것이 당연한것이다.

그렇게 멋들어지게 꾸미고 거리를 나섰다.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 커피를 마실 것인가? 아니다 스타벅스에 가서 뉴요커처럼 근사하게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로고가 잘 보이게 들고 폼나게 마셔주는 것이 이 복장에 대한 예의다.

이거이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힙한 인싸라는 거다.

자. 이렇게 입고 있으니 이제 인증해야 할거 아닌가? 인스타그램으로 인증을 해줘야 제대로 마무리가 된다.

한마디로 이제 우리는 상품이 아닌 이미지를 소비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이다.


언젠가 르네마그리트의 작품을 봤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이프 담배 그림을 그려놓고는 파이프 그림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생각해 보니 맞다.

그것은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눠서 이야기했는데 쉽게 말하면 담배에 X자를 크게 그려 넣은 금연 표시를 보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금연'이라는 언어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기호는 그 원본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런데 보드리야르는 지금의 우리 세상을 보니 이미지들이 하극상을 벌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원본 즉 실제를 능가하고 넘어서려고 하는 현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럼 나이키의 원본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이키 본사 건물? 이름도 잘 모르는 나이키 회장님? 그런 건 상관없다. 나이키를 사면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을 가진 멋진 내가 되는 것 같다.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동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애플은 어떤가? 애플을 사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애플사에서 만든 제품을 들고 있으면 나는 첨단의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얼리어답터이면서 디자인 센스도 있고 아날로그 감성도 놓치지 않는 센스쟁이 같다.

원본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원본은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그렇다. 나는 나이키의 사장이 누군지 모른다.

우리는 기호와 이미지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을 보자. 온갖 상표가 넘쳐나는 도시 건물 간판에 어디 실재가 존재하는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짜들이 진짜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기호와 이미지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뮬라시옹은 우리가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며, 시뮬라시옹을 통해 만들어진 실제를 뛰어넘는 이미지를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이제 가상현실, 메타버스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실재와 시뮬라크르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의 생각은 결국 1999년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영화 '트루먼 쇼'가 떠오른다. 거대한 돔 안에 구축된 세트장에서 30년간 그는 자신의 삶이 방송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간다. 어느 날 문득 가짜 현실을 깨닫고 첫사랑을 실비아를 찾아 세트장을 나간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트루먼과 같이 세트장 밖으로 나갈 용기기 있을까?


이런 상상과 사색의 끝에 닿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백화점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한다.

잔디를 노점상 주인에게 잠시 맡긴 후 서둘러 백화점 안에 들어가 대충 보이는 티셔츠 하나를 사서 나왔다.

안타깝지만 원 플러스 원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찢어진 티셔츠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걸레로 쓰기로 했다.

인생이란 그런 것 아닐까? 때로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도 충분히 괜찮고, 가끔은 찢어진 티셔츠를 입고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 모른다.

그리고 남겨진 시간과 마음은 티셔츠보다는 내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아 더 나를 위한 선택일수 있다.

찢어진 옷을 왜 들고 들어왔냐는 아내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싶다.

잔디가 내 털이라도 좀 빌려줄까? 묻는 것 같다.

녀석은 털이 없어 슬픈 짐승을 동정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괜찮다.

때로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도 충분히 괜찮다.

가끔은 뻔뻔스럽게 찢어진 티셔츠를 입고 나간다고 해도 나는 변하지 않는 그대로의 나일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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