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과 귀찮음의 재평가
인도 가장자리에 서서 손을 흔드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부쩍 드물어졌다. 아주 꼬꼬마였을 때는 멀리서 하얀색 차만 보여도 손을 흔들었던 기억이 나고, '빈차' 등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빨간 불빛에 의존해 손을 뻗었는데 이제는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가만히 배차를 기다린다. 내가 지금 일하는 약국은 제주도에서도 꽤 외진 곳에 있어 길에서 택시를 잡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자가용이 없는 손님들은 거의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서 택시를 잡고 만약 애플리케이션 사용을 어려워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이 있으면 종종 택시를 대신 잡아드리기도 한다.
애플리케이션이 가져다준 편리함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실 손을 뻗어 택시를 잡는 것이 좋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을 전자기기의 사용 시간을 몇 분 더 늘리기보다는 도로에 시선을 고정하고 빨간 불빛이 반짝이는 하얀 자동차가 혹시라도 나를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지 염려하면서 손으로 내가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호를 그려보는 행위가 좋았다. 물론 너무 춥거나 더운 날씨는 예외로 한다.
택시를 알아서 잡아주는 것 같은 애플리케이션이나, 전자기기, 자동화 장치 등의 홍보문구에 절대 빠지지 않는 단어가 '편리함'이다. 편하고, 이로운 것. 나도 이 편리함에 대한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해 온 장치들이 집에 가득하다. 자동차는 이동을 편리하게 해 주고, 청소기는 청소를 편리하게 해 주고, 얼마 전엔 나 대신 걸레질을 대신해줄 회전식 전동 걸레기도 샀다. 그런데 편한 것이 곧장 이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편리하다는 단어를 너무 자주 사용해서 편한 것은 당연히 이로운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라면 편한 것이 곧 이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에피쿠로스가 이야기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우리가 쾌락하면 흔히 생각하는 방탕함이나 육체적인 쾌락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그래서 만약 '편함'을 '귀찮음의 고통'이 없는 상태로 받아들인다면 편함은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궁극적인 결과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를 함께 역설한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하지 않았을 때 당장은 편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몸의 이곳저곳이 아파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단기적 쾌락은 장기적 고통일 수도 있다. 다음은 에피쿠로스가 저서 '쾌락'에서 한 이야기이다.
"어떠한 쾌락도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쾌락들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편한 모든 것에 편리하다는 단어를 갖다 붙인다. 그러나 사실 편한 것은 편리한 것과 편해한(편하고 해로운) 것으로 구분지어야 한다. 어떤 편한 것은 이로운 특성과 해로운 특성을 동시에 지닐 수도 있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이 집 근처 배달 음식점을 손쉽게 검색하고 주문까지 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했다면, 결과적으로는 배달비로 인해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늘어나고 과도한 배달이 환경 문제를 야기한 것도 사실이다. 집 앞 오분 거리에 있는 음식점까지 가기 귀찮아 배달비 삼천 원을 내고 예쁜 일회용 포장용기에 담긴 음식을 주문했다면 이것이 과연 편리한 것인지 편해한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편리한 ㅇㅇㅇ'은 새로운 제품을 소개하기 위한 광고 문구뿐만 아니라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캐치프레이즈로도 흔하게 사용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편한 것은 온전히 이롭지 않을 수도 있는데 '편리'한 것이 최고인 것처럼 갈수록 이 단어가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편하지만 편리하지는 않은 것들이 있고, 귀찮지만 해롭지는 않은 것들이 있다. 누군가는 디지털화, 자동화가 세계적 추세이며 그에 거부하는 건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추세가 지향하는 것이 네트워크의 확산인지 개인주의의 팽배인지, 세계화인지 탈세계화인지는 조금 모호하다. 만약 디지털화가 물리적 관계의 단절을 통해 개인주의를 확산했다면, 이건 지구촌 시대를 이끌고 인류를 하나로 통합할 줄 알았던 시대적 흐름에 역행한 것이 아닐까.
세계가 이대로 계속 흘러가버리면 공허함 밖에 남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무한히 팽창하면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우주처럼, 과도하게 편해진 세상에선 따뜻함을 찾아볼 수 없다. 편리한 슬픔이다. 사실 나도 현대 문명에 잔뜩 녹아버린 상태라 무작정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언행이 불일치하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이 있다. 지금 두드리고 있는 편리한 키보드를 던져버리고 언제 마지막으로 써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연필과 지우개를 손에 쥘 마음은 없으니까. 그래도 퇴근 후 저녁으로 배달 음식 대신 김치찜을 요리할 계획을 세우고, 읽고 싶은 책을 주문할 책방을 찾으면서 귀찮은 것들에게서 온기를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