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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Jun 05. 2023

엄마, 내가 노래 불러줄까?

어, 어, 좋, 좋지...


내일은 재수생 아들이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다. 몸은 비록 멀리 있지만 걱정스런 마음에 위쳇 영상통화를 걸었다. 평소에는 잔소리꾼 엄마의 전화를 일부러 피하던 아들이 웬일인지 바로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앗, 노래방이다. 친구들과 같이 온 줄 알고 바로 끊으려니 혼자 왔단다. 모의고사를 앞두고 혼자 노래방이라니, 엄마의 마음이 아릿해진다. 문득, 아들이 하는 말,

 

엄마, 내가 노래 좀 불러줄까?
어, 어, 그럴래...? 좋, 좋지...


그렇게 1시간 동안 영상통화로 아들의 노래방 체험을 함께 하게 됐다. 남편이 그랬다면  따위 소음을 나 들으라고 내는 거냐며 한 곡도 못 참고 '이어' 했을 것이다. 근데 아들이니까, 세상에서  이쁜 내 아들이니까, 나는 기쁘면서도 아련한 마음으로 20곡을 다 들었다. 화면상이지만 노래도 같이 따라 부르고(아는 노래는 박효신의 '야생화' 밖에 없었지만), 신나게 고개도 끄덕 박수도 쳐주  " 와! 잘 부른다! 아이돌 해야 하는 거 아냐?" 라며 과한(?) 추임새도 넣었다.


내향형 아들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아들은 발라드를 부를 땐 오늘 실연사람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간절한 손짓을 하는가 하면, 랩을 부를 땐 래퍼들처럼 성난 삿대질을 마구 해댔다. 경쾌한 사랑 노래 끝에는 팬서비스 손가락 하트 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치 엄마, 음치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의 증폭 유전자를 아직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노래 부르는 자신에게 빠져, 18세의 특유의 들뜬 갬성과 얕은 열정을 다해 목이 쉬도록 부르고 또 불렀다. 나는 슬슬 오줌이 마렵고 배도 고프고 봐야 할 드라마가 밀려있었지만, 기꺼이 참았다. 내 아들이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우리 아들에게 이런 친절한 시간을 오롯이 내어줄까 싶어서.


엄마, 나  노래 너무 잘 불러서
여자들이 반하면 어쩌지?


나  안경 벗으면 좀 분위기 있지?


나, 랩도 꽤 잘해.


'야생화' 같은 노래가 오히려 더 쉬워.


아들의 근거 없이 진지한 자신감에 웃음이 새어 나오고 내 평소 언어 습관대로, 정신 번쩍 들게 훅 쏘아주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내 아들이니까, 어른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듯해도 저만큼의 성장을 이뤄내는데 제 딴에 얼마나 고단했을까 싶어서.



아들이  살 땐가, "엄마 나 잘하지?" 하며 짱구 개다리 춤을 신나게 보여주던 때가 생각난다. 엄마의 사랑과 인정 최고로 중요하던 쬐그만 아가가 어느새 이렇 자라 삐죽삐죽 수염에, 울긋불긋 여드름 난 멀대 청년이 되었다.


아들에게서 청년이었던 내 남편의 모습을 본다.  청년을 사랑했던 내 모습. 본업은 농사고 학업은 부업이던 20대 초반의 남편, 도시에서 나고 자란 깍쟁이 여학생 나를 꼬시겠다며 해지는 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의 필살기 '태권도 춤'을 보여주었다. 너무 진지하고, 어이없이 순수한 모습에 방심하다가 느새 나는 그의 아내가 되다. 내가 남편에게 반했던 바로 그 수하고 엉뚱한 포인, 지금 아들에게서 본다. 아들의 이런 모습을 사랑해 주는 여자가 있으려나. 



이제 아들 앞에는 부모가 막아줄 수 없는 인생의 철퇴가 사정없이 내리칠 것이다. 무수한 여자들이 흙수저 평범남인 아들에게 퇴짜 놓을 것이며, 아들은 사회초년생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지치고 고단하게 보낼 것이다. 좀 더 지나서는 책임과 의무에 짓눌리, 무시와 냉대, 좌절과 실패, 부정의, 불운 을 일상적으로 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엄마인 나 역시도 인생의 철퇴를 맨몸으로 맞고 서 있는  것을.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뿐인 것을.


노래방의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아들은 노래방을 나와 길고 긴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모의고사를 치렀다. 다소 실망하긴 했지만 용기를 잃지는 않았다. 멀리서, 아들의 평안만을 바랄 뿐이다.


*이미지 출처, 요시타케 신스케, 《그렇게 그렇게》, 주니어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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