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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우 Jul 12. 2022

핑크머리 캐릭터와 지뢰계

의도된 병든 소녀들과 의도되지 않은 병든 소녀들에 관하여

분홍색은 대체로 소녀(각종 마법소녀물의 여주인공) 혹은 섹시계열(<달링 인 더 프랑키스>의 제로투 등), 남성 인물의 경우 쇼타라고 불리는 작거나 여성스러운 이미지의 캐릭터(<앙상블 스타즈!>의 히메미야 토리 등)에게 주어지는 머리색이다. 지난 수십년간 핑크는 여자아이의 색으로 알려져 온 만큼, 분홍 머리는 대체로 사랑스러운 여성(특히 소녀) 인물들에게 주어져 왔다.


그러나 서브컬쳐에 관해 어느정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분홍머리 캐릭터가 갖는 이면들에 대해서도 들어봤을 것이다. 얀데레를 대표하는 캐릭터 <미래일기>의 가사이 유노와 <해피 슈가라이프>의 마즈자카 사토,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는 <학교생활!>의 가사이 유노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카나메 마도카, <교정 뒷편에는 천사가 묻혀있다>의 하치야 아이, 앞선 인물들에 비해 정서적으로 불안한 것은 아니나 초반 다중인격의 성격을 보였고, 전통적인 분홍색 머리에 기대되는 것과 달리 괴력 속성을 지녔던 <나루토>의 하루노 사쿠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괴상한 성격의 핑크 머리 인물은 기성 작품 뿐 아니라 일부 자캐연성(특정 만화의 등장인물이 아닌, 본인이 창작한 캐릭터를 활용하여 가벼운 창작 활동을 즐기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분홍 머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기성 작품이건 아마추어의 유희활동이건 그 근본은 동일하리라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핑크에는 소녀스러움, 아동 만화의 여주인공과 같은 이미지가 오랫동안 제공되어 왔다. 그렇기에 분홍색이 제공된 인물에게 전통적이지 않은 인물상을 제시했을 때, 사람들은 기대했던 것과는 전연 다른 모습에 충격과 흥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캐릭터의 일부가 성격을 대변하도록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를 모에요소라고 한다.


모에란 단어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모에란, 기호화 된 캐릭터의 특성들의 모음, 혹은 그 모음들을 조립하면서 이루어진 규격화라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실눈(혹은 감은 눈)에 중국풍 옷을 입었으며, 잔 실수를 자주 하는 캐릭터가 있다면 서브컬쳐에 큰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해당 인물이 속이 음험하거나,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다고 추측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캐릭터는 이런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듯, 혹은 그런 기대를 꿈꾸게 만들듯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핑크머리는 모에 요소이다. 그것도 전통적으로는 순수한 소녀 혹은 색기 넘치는 요녀의 모습이 기대되어 온다. 사람들은 분홍머리의 작은 소녀 혹은 소년을 보았을 때 얌전하고 조금은 수줍음 많거나, 머리색이 진하다면 당돌한 면이 있는 인물 정도로 생각 할 것이다. 얀데레 혹은 광인의 이미지는 그러한 전통을 정면으로 부수는 일에 해당한다. 오타쿠 용어로는 갭모에라 하지만 문학에서는 이를 '비틀기'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갭모에, 즉 비틀기는 앞서 말했듯 처음 접했을 때 신선함과 놀라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놀람이란 반복 되었을 때에는 큰 효과를 갖기 어렵다. 특히나 유행에 민감한 서브컬쳐의 특성상, 몹시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면 그것의 아류 혹은 리메이크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독자들은 그런 유사성을 가진 인물들에게 계속해서 노출되기 마련이다. <해피 슈가 라이프>와 <미래일기>의 충격이 이미 판을 한 번 뒤 덮고 지나가 버린 지금,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분홍머리 소녀 캐릭터는 더이상 충격을 줄 수 없는 수준을 넘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정식 창작물 속의 분홍 머리 소녀 캐릭터들과는 달리, 아마추어물, 즉 자캐연성의 경우에는 해당 캐릭터에 대한 관습성을 부수는 것 보다는,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작가의 미숙함에 의한 과도한 캐릭터성이 덧대어져 생긴 오류에 가깝다. 자신의 캐릭터가 소녀 같고, 여성스러우며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디자인 하였지만,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들과 설정들이 개입되며 캐릭터성이 붕괴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부정적 경향은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이 창작 경험이 적고 서브컬쳐의 조예가 약한 이들 위주로 일어나기 때문에 분홍 머리 캐릭터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미숙함과 분홍의 연결고리는 최근의 소위 근래에 나타나는 '지뢰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지뢰계란 정서적으로는 불안정하나 외형상에는 크게 티가 나지 않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 대개는 10대 중후반에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우울증, PTSD등을 겪으면서 외형상으로는 귀여운 것을 추구하는 청소년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어느샌가 부터 코디의 일종 처럼도 쓰이는 면이 있다. 분홍과 검정, 리본, 프릴등이 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고딕 롤리타와 유사하나, 코스프레의 모습에 가까웠던 고딕롤리타 보다는 조금 더 일상적인 패션이 해당된다. 특히 <부탁해 마이멜로디>의 쿠루미가 지뢰계 인물들이 선호하는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러한 유행에 대해 앞서 자캐에게 소녀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본인이 어리고 순수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타인에게의 어필이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성장에 대한 거부일 수도 실제 자아가 미숙해서 생긴 일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결국 내면의 다른 문제들 때문이다. 우울증을 비롯한 문제들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서적 성숙을 방해한다. 이들의 자아 찾기는 자캐연성에서 문제시 되는 핑크 머리 캐릭터와 같이 어린아이로의 회귀와 현재의 문제가 부자연스럽게 엮여 있는 상황이며, 이런 인물들의 자아 표출 방식, 즉 쿠루미와 같은 특정 캐릭터의 소비가 세간에 다수 노출되며 부정적 인식을 고착화 시키는데 한 몫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클은 끊임없이 돌면서 현실에서나 기성 창작물 속에서나, 아마추어 창작물 속에서나 분홍머리 여성 캐릭터는 이상하다라는 인식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병든 소녀와 의도되지 않은 병든 소녀, 아마도 전자가 후자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원래 없었던 존재가 창작물에 영향을 받아 뿅 하고 완전히 새로이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전까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던 이들이 분홍색을 입고 기호화 된 것이 핑크머리 자캐와 지뢰계가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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