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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우 Nov 01. 2022

공정을 바라는 사람들의 사회

이태원 압사 사고와 관련한 이야기

사회적 주목도가 높은 이야기를 할 때 좋은 점은 조회수가 잘 뛴다는 것이고, 나쁜점은 큰 관심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하던 시절에는 이런 주목도가 높은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에는 검색 노출을 막는 옵션을 선택해두곤 했는데 브런치에는 아쉽게도 그런 기능이 없는 듯 하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크게 두가지다 첫 번째는 내가 개인적으로 지인들과 하는 이야기, 두 번째는 커뮤니티 반응의 이야기. 이 브런치의 주된 주제가 서브컬쳐, 커뮤니티 등을 다루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 후자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렇다보니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의 2차 가해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악플에 가까운 2차 가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두둔하려는 생각도 없다. 이에 대해서는 미리 이야기를 하고 시작하겠다. 최대한 문제의 소지가 되지 않을만한 단어를 가려 사용하도록 애쓰겠으며 그럼에도 걸러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댓글로 지적할 경우 최대한 반영하여 수정하도록 하겠다.




90년대생의 주요 키워드가 공정, 공정한 사회이며 이것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언젠가 아는 사람과 한 적이있다. 그 분의 주장에 의하면, 세월호 사건은 정해진 루트를 따라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배워 온 그 또래 세대들의 사고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건이었다고 한다. 이후 청소년 및 청년 초기 한창 가치관이 만들어져야 할 시기에,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당하고 큰 혼란을 겪은 이들은 법제화된 것과 수치적인 것, 특히 결과적 공정이야말로 최고의 공정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에게 관습이나 감정에의 호소는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이 분의 말에 일부분은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세월호 사건 때 다른 의미의 공정을 보았다. 나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또래이다. 그렇기에 그 당시 대학 입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또래가 죽었다는데 슬프지 않았을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슬픔과 별개로 우리에게 문제가 된 것은 단원고 생존자들이 세월호 특별 전형으로 대학을 간다는 것이었다. 몇몇은 대입원서접수 사이트의 경쟁률을 보면서, 특별 전형 응시자의 수를 살폈다.(물론 이 특별 전형이란게 단원고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외국학교 출신이라던가 다른 응시생들도 있었을 것인데, 아직 아이들의 생각의 폭이 이것까지 고려 할 만큼 넓지 않았음에 대해 이해하며 들어주길 바란다.)


여기에는 단원고 학생들의 성적이 높지 않은 편이었다는 소문까지 섞여서 '나는 열심히해서 겨우가는 대학을 쟤네는 성적도 높지 안흔데 손 쉽게 들어간다' 라는 여론이 존재했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이 아이들이 이기적이거나 이상한 아이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열여덟, 아홉살짜리들이 그 얘기를 듣자마자 또래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도 입시부터 떠올리게 만든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나는 이들이 이렇게 매정하게, 사람에 따라서는 악하거나 이기적으로 보일 수있는 가치관이 심어진 것이 부족한 자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5년 전후는 이미 취업난에 관한 뉴스가 일상이 되어버린 때 중 하나이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충실히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선생님께 잘보여 학생부를 잘 쓰여지고,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에 대한 가치관이 조금씩 금이 가던 시기인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좋은 대학을 감으로서, 좋은 일자리를 얻는다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깨진 시기는 아니었다. 당장 내 미래조차 너무나 불투명하고 비관적이게 보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 배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나는 이태원 사건은 두가지 측면에서 세월호 사건과 비슷한 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기존 가치관의 부정이다.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가장 큰 차이는 발생 위치에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점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이며 치방센터와 구급센터가 도보로 이동 할 수 있는 거리내에 있었고, 준종합급 이상의 병원들 역시 사방에 즐비해 있었다. 그럼에도 세월호 이후 최대 규모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거기에 대개 이러한 종류의 사고가 일어났을 때 다수의 부상자와 소수의 사망자를 가졌던 기존의 사고들에 대한 통념과 달리, 가장 젊고 생존력이 높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청년층이, 사상자의 절반 가량이 현장에서 즉사 혹은 심정지를 당한 일이라는 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이미 공정에 대한 기대가 크게 깨져버린 후 인데다, 아직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앞으로 어떤 새로운 여론과 가치관들이 발생할 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이 세월호 때와 마찬가지로 그 또래 혹은 아랫세대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줄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공정은 이들의 가치관 중 변화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키워드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역차별과 관련된 공정일 것이다. 이는 사고 자체보다도 보상금이나 국가애도기간 선포등과 관련된 문제일 것인데, 아무래도 천안함 사태 이후 10 여년 만에 최초로 선포된 국가애도기간이다보니, 선포의 기준

사람들이 욕을 하는 이유가 역차별을 당했다고 느끼는 이유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앞서 길게 말한 입시와 부족한 자원에 의해 발생했던 분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이 비교적 호황이었다면 위로금 지급등에 대하여 지금만큼 반발이 크지 않은 상태로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3년 간 코로나로 인해 경제가 크게 위축 된 상황에서 미래 전망까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쟤네는 죽었다는 이유로 돈과  배려를 받는다. 라는 식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기름을 붓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문제 대다수는 두번째 문제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결과적 공정에 위배되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 일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이들의 생각에는 놀러 간 애들이 죽었는데 왜 내가 역차별을 당하는가 라는 생각이 가장 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적어도 학교 수업의 연장선인 수학여행을 갔다가 참사를 당했던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사고가 다르다라고 누군가는 느끼고 있는 지점일 수도 있다.




여기에 이태원 사고이 갖는 몇가지 다른 특이성을 이야기 하자면, 이전 카푸어 관련 글에서도 말 한 적 있는 희생자에 대한 공격과 관련된 공정이다. 근래에는 사회적 인식이 크게 변화되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크게 사라진 편이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옷을 그렇게 입어서, 밤늦게 돌아다녀서와 같은 피해자 비난이 많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희생자들에 대한 비난은 "공정한 세상의 편견"과 연관된 부분이다. 앞서 말한 것들과 좀 다르면서도 유사한 뜻의 공정이라는 의미가 여기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이번 사고에서 많이 보이는 말 중 하나는 "놀러 간 애들을~"로 시작하는 말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의 기저의식에 나는 그런 곳에 가지 않는다. 나는 유흥을 즐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나와 그들은 다르고, 그들이 죽은 것은 나와 달리 특별히 악하거나 잘못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요약하자면 "나는(내자식은) 그들과 다르니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것이다."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다. 욕을 하고 있는 이들 중 많은 수 역시 해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두려워 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인 셈이다.


또한 현재 토끼머리띠를 한 남성을 찾는다는 점 역시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봄직한데. 현재 사고에대한 명확한 책임소재가 없다는 것이 사회적 정의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기에 책임의 소지를 가진 누군가를 찾아내고, 그의 처벌이 공정한 사회를 이룩한다고 믿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현재 많은 이들이 갖는 슬픔, 공포, 분노는 갈 길을 완전히 잃은 상태이기에, 만약 책임소재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지목당하고, 공격당한다면 그것은 강도높은 마녀사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사고를 두고의 여론은 끊임없이 바뀔 것이며 어쩌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지금의 상황을 보며 생각하고 있다. 그 때가 되었을 때 이글은 아마도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주장을 하는 대역 죄인의 글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이 사건에 절대적 악인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사건 발생 3일 후 기준이다. 아마 앞으로는 꽤 바뀌지 않겠나 라고 생각한다)의 여론전과 유사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심으로 죽은 사람들을 통쾌하게 생각하는 비사회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도 완전히 없지는 않겠지만, 각자는 각자의 길을 충실하게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 속에서 와류가 생겨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심지어 모두가 각자의 공정과 정의에 기반하여 말 하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충격만 메아리친다는 데에서 사고 그 자체와는 별개의 비극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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