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병준 Mar 08. 2022

<12명의 성난 사람들>에 대한 작은 고찰

'<12명의 성난 사람들>  - 시드니 루멧'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12명의 배심원단이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빈민가 소년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1957년에 제작되었으며 흑백영화다. 제작된지 70년 정도가 지났지만 현재에도 이 영화가 명작으로 취급받으며, 내게 신선함과 재미를 선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 다루기 전에 먼저 이 영화에서 겉보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흑백’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57년 제작인 이 영화가 오래 되었긴 했지만 57년은 분명 컬러 기술이 있던 시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된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이때 당시만 해도 컬러영화는 뮤지컬, 아동영화등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영화에 사용되었다. 이 영화는 밝은 분위기만 유지하기에는 그 주제나 내러티브에서 무리가 있다. 당연히 이 시대상에서 이 영화는-드라마 장르- 흑백영화로 제작되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흑백의 화면은 이 영화의 어느정도 진지한, 무겁다고 볼 수 있는 주제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흑백의 화면이 만드는 효과는 또 있었다. 화면의 극적 대비는 분명 ‘색’에 강하게 끌린다. 그러나 흑백인 이 영화에서는 인물의 행동, 시선이 그 자체로 극적 대비가 되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한다. 밀실에서 대사가 전부인 이 영화에서 관객의 시선을 끌어와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미쟝센과 촬영기법에서도 눈 여겨 볼만한 부분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에서 신선함을 가져오는 부분은 ‘작은 밀실’에서의 촬영이다. 카메라는 밀실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흔한 추리영화에서 자주쓰는 ‘인물의 대사가 보이스오버 되며 나오는 자료화면’도 나오지 않는다. 카메라도 꼼짝없이 밀실에 갇힌 것이다. 그럼에도 뛰어난 각본으로 관객은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작은 밀실에서는 화면 연출에 분명 한계가 생긴다. 새로운 요소가 등장하지도 않고 그저 그 밀실안에 있는 것들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 12명의 인물을 활용하며 화면연출을 완성해냈다. 다수 대 소수. 일어섬과 앉음의 움직임.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그 자체로 연출이 되었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역정을 지르며 자신의 편견을 설파하는 인물에게서 한 명씩 일어나 뒤도는 장면이다. 롱쇼트에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장면은 인물이 뒤돈다는 움직임에서 나오는 상징적인 의미로 관객에게 직접적인 대사 없이 셔레이드만으로 의미를 전달했다. 밀실 안에서는 카메라 움직임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갑자기 드론 촬영술을 활용하거나 마구 움직이는 카메라 연출을 할 수는 없지 않나. 감독은 앵글을 통해 이 한계를 극복했다. 영화가 전개되고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카메라 앵글은 서서히 아래로 향한다. 결국 카메라는 벽과 천장을 비추고, 밀실에 대한 공포가 엄습한다. 이 밀실 공포는 영화 후반부 갈등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영화에 등장하는 12명의 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캐릭터가 살아있다. 이것은 곧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요소로 다가왔다. 이 영화와 비슷한,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만으로 전개해 나가는 영화인 <맨 프롬 어스>와 비교했을 때 이 캐릭터에 대한 부분은 더욱 도드라진다. <맨 프롬 어스>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나 한 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다른 인물들을 설득시킨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전개방식은 같다. 그러나 대체로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캐릭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맨 프롬 어스>에서 주인공, 즉 행동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자신이 14000년을 살았다고 설득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 인물은 어딘가 미흡하다. 14000년을 산 사람의 초월한 지성, 깨달음이 보이지 않고 영화 내에서 언급하듯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질문에 답변한다. 관객은 점점 주인공이 다른 인물들을 설득하는 것을 응원하기 보다 다른 인물들이 주인공을 논파하길 응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기름을 냅다 붓는 것이 ‘종교에 관한 이야기’ 결국 관객은 주인공에 적대되는 인물들을 응원하게 되고, 주인공의 말이 옳다고 밝혀졌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어려워진다. 그와 반대로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설득하는 인물은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이 인물은 소수이나, 차분하고 논리적이다.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제목 그대로 ‘성나있고’ 어쩌면 몰상식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관객은 논리적인 주인공에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이 걸린(빈민가 소년이 유죄로 판결날 경우 사형이다.)문제에서 신중하게 생각하자고 주장하는 주인공은 ‘선’을 표방한다. 관객은 주인공과 함께하게 되고, 결국 모두를 설득했을 때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엄청나다.

설득하는 인물인 주인공을 제외한 11명의 인물들은 캐릭터성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지성을 가진 노인, 어떤 인물은 빈민가 출신, 어떤 인물은 재치있는 입담을 가졌고 어떤 인물은 빈민사 출신을 혐오한다. 이 인물들 모두 직업이 다르고 그 직업에 따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인물은 가정사에 따라 성격을 가지기도 한다. 이런 인물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관객에게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한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생각하기에 따라 ‘민주제의 장점’, ‘사형제도에 관해’ 등등 나올 수 있겠지만 난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말했듯 주인공을 제외한 11명의 인물들 모두 현실에 있을 법한 각각의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다. 이 인물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관객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들을 설득한다. 감독이 관객을 설득한다. 사실을 보라고. 편견을 깨보라고. 기득권 세력의 말을 의심해보라고. 그리고 관객은 영화속 인물들이 설득당하듯 감독에게 설득당한다. 감화된다. 메시지가 마음 깊숙이 박힌다. 감독은 주인공이 다른 인물들을 논파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한 번쯤 의심해보라고 전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영화, 그 뒤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