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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준 Sep 22. 2022

어머니, 안고 싶은 그 이름

<로마> - 알폰소 쿠아론

 <로마>는 ‘멕시코 시티 로마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 클레오가 사회적 억압 속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겪지만 고용인 가족과의 유대를 통해 위로받고 극복하는’ 이야기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그의 어린시절 그를 키워줬던 가정부 리보에게 바치는 영화다. 리보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사회의 억압 속에 놓인 그녀의 삶을 비추면서 동시에 멕시코 사회에 만연한 문제를 꼬집는다. 쿠아론 감독은 어떤 화면 연출로 그녀를 화면에 담고 있으며 어떤 사회적 문제를 다룬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연출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다. 이 영화는 영화의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격자 무늬로 된 바닥을 비추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영화 시작 이후 4분동안 계속해서 바닥을 비추고 있다. 관객은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청소하는 듯한 소리와 화면을 침범하는 거품물을 바라보며 이 소리를 내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관객은 이 격자무늬 속에 갇힌 것이다. 그리고 4분의 시간이 지나고 카메라가 드디어 틸트업해서 비추는 것은 집안일을 분주하게 하고 있는 주인공 클레오의 모습이다. 클레오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 집의 정원에도 격자무늬를 지닌 요소들이 많다. 철창으로 가로막힌 문, 철창이 쳐진 창문, 새가 갇혀있는 철창, 격자무늬 틀을 가진 문. 그리고 클레오는 창고에 들어가며 잠시 화면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결국 관객은 내용이 나오기 전에 이 5분가량의 롱테이크 하나만으로 클레오가 억압받는 답답한 상황 속에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후의 컷에도 클레오는 집안일을 하며 계속해서 화면 밖으로 나간다. 관객은 클레오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하며 답답함이 관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연출은 카메라의 ‘횡적 움직임’이다. 영화는 주인공 클레오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를 하이앵글로 잡지도 않고 뛰어난 카메라 기교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샷이 아이레벨-지상에서 160cm 정도- 이고 샷 사이즈는 롱 쇼트가 눈에 띄게 많다. 즉, 카메라의 패닝을 통해서만 클레오를 비춤으로 클레오가 어디를 가고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객은 집중하게 된다.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인물보다 인물이 놓여진 상황에 더 주안점을 둘 수 있다. 인물의 횡적 움직임을 강조하는 만큼 화면 비율 또한 가로로 많은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이 영화의 화면 비율은 2.35:1로 시네마스코프 비율이다. 가로로 긴 만큼 인물이 가로로 이동할 때 인물의 동작이 더 과장되어 보이고, 그 인물 주변에 많은 요소를 담을 수 있다. 횡적 움직임이 강조되는 만큼 영화에 드문드문 나오는 종적 움직임은 더욱 강조되는 효과를 가진다. 대표적으로 엔딩 시퀀스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모든 사회적 억압을 극복해낸 클레오는 그제서야 비로소 계단을 올라가며 클레오를 가둬두었던 건물들 속에서 벗어난다. 이 장면은 횡적 움직임이 많이 강조된 오프닝 시퀀스와 대비되며 확실히 달라진 클레오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카메라 앵글 또한 로우앵글로 그녀를 잡음으로 앵글 또한 대비된다. 영화에서 ‘비행기’는 중요한 상징적 요소로서 작용하는데, 그 의미를 떠나서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바닥에 뿌려진 물에 비춰보였던 비행기가 엔딩 씬에서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확실히 그녀가 좀 더 자유로워졌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이 클레오라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면서 그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사건으로 멕시코의 틀라텔롤코라는 우리나라의 5.18 혁명과 비슷한 사건을 다룬다. 표면적으로는 이 사건만 사회적문제로 다루고 있는 듯 하지만 이 사건은 그 때 당시의 상황 자체를 나타내며 한 순간으로서의 문제에 대해 알리고 있다. 아직까지 사회적 문제로 남고 있는 예전부터 이어진 사회적 문제는 클레오라는 인물이 담고 있다. 즉 이 인물이야말로 멕시코 사회에 만연한 모든 문제를 담고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먼저 멕시코 사회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남아 있는데 이 때문에 메스티소라는 원주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인종과 스페인계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 차이가 있다. 원주민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는 기껏해야 가정부로써 일할 수 있는 차별이 사회에 만연하다. 영화는 이 사실을 클레오가 옥상에서 일하고 있을 때 화면에 잡는다. 카메라는 클레오와 아이 페페가 평상에 누워있는 장면에서 갑자기 붐업을 해서 그 주변 정경을 보여준다. 이 정경에는 클레오와 마찬가지로 옥상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 가정부들이 많이 보이고 이들은 모두 클레오와 비슷한 원주민 형질을 많이 가진 메스티소다. 클레오에게 가장 큰 시련으로 다가오는 임신 문제 또한 멕시코 사회에서 큰 문제다. 멕시코 사회에는 미혼모의 비율이 굉장히 크다고 한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임신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하류층에서 이러한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 아이를 낙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멕시코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종교는 카톨릭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카톨릭인 멕시코에서는 낙태가 굉장히 터부시되고 이러한 사회 풍조 때문에 대다수의 미혼모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고 키운다. 앞서 말했듯 미혼모중에는 하류층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자식 또한 어쩔 수 없이 하류층이 되는 가난의 굴레 속에 빠지게 된다. 영화 속 클레오 또한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요.’ 클레오가 신생아실을 보고 있을 때, 지진이 나서 그 잔해가 신생아를 덮고 있는 생명유지장치 케이스 위로 떨어진 것 또한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클레오와 뱃속의 아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리보를 위해’라는 자막이 나온다. 앞서 말했듯 리보라는 여성은 이 클레오의 모델이 되는 실존 인물이자 쿠아론 감독을 키운 가정부다. 감독은 이 가정부를 어머니처럼 따랏다고 하는데, 그만큼 이 가정부가 사회적 억압 속에서 겪은 일들이 안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쿠아론 감독은 이 영화를 리보에게 바침으로 단순히 리보를 위로한다는 의도도 담고있지만 같은 문제를 겪은 멕시코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있다. 감독은 영화 속 상류층인 고용인의 가족과 하류층인 클레오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 모습을 통해 감독은 이분법으로 나뉘어진 사회 계층의 벽을 허물고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자고 의견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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