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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림 Sep 27. 2023

피는 왜 빨강인가

그녀

 언제까지 겨울에 갇혀 살 수 없다. 눈이 내려 포근해질 것처럼 굴다가도 매운 바람이 불 때마다 땅은 몇 번이나 얼었다 녹았다. 짙은 남색의 하늘에 가로등이 여전히 보름달인 것처럼 굴지만,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지점이 어제보다 높았다. 가스비가 조금은 덜 나올까 싶어 밤새 찬물 쪽으로 두었던 수도 꼭지를 완전히 왼쪽으로 돌리고, 하얗게 버짐이 일어난 손등을 적셨다. 인간의 몸은 절반 넘게 수분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이렇게 매일 밤 조금씩 말라버리면 언젠간 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새가 된다고 뭘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그대에게 날아가고 싶다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다 픽 웃는다. 날아가면 뭐하나. 두 팔 대신 날개가 달려 껴안을 수도 없는데.


 눈이 온 다음날은 으레 서두르기 싫다. 이대로 나간다면 언덕을 내려가다 한 번 미끄러질 테고,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몇 번이나 저항 없이 뒤로 나자빠질 게 뻔했다. 부지런한 누군가가 염화칼슘을 뿌리고 지나갔더라도 족히 한 시간은 지나야 운동화 밑창이 사분면인양 활보하는 알갱이들의 점좌표를 파악할 일이 없을 것이다. 눈은 왜 오는 걸까. 창문 너머 하얀 먼지가 허공을 부유하면 강의 도중에 뛰쳐나가 머리 위로 마음껏 내려앉도록 허락하고, 숨을 쉴 때마다 섞여오는 겨울 냄새를 폐 한 구석에 가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감정들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나이가 들면 무뎌지는 것들 중 하나인가 싶다가도, 그녀를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쉰 번이 넘도록 찾아온 첫눈 소식에 그녀는 털모자로 잿빛 머리와 귀를 가렸으나 미처 가리지 못한 코가 빨개지도록 겹겹이 쌓이고 있는 흰색을 쓸고, 또 쓸면서 말했다. 너 왔다고 눈도 오네. 눈 오니까 좋지? 그녀의 기억 속에는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있어서 잊힌 것들을 다시 소환해야 했다. 눈을 좋아하던 그 소녀는 말한다. "눈사람도 만들까?"


 오후 네 시 삼십분. 그녀는 이쯤이면 이른 저녁을 준비하거나, 수백개가 되는 채널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 어버이날 한 달 생활비를 털어 품에 안겨준 연보라색 트레이닝복 대신 목이 늘어난 검붉은 티셔츠에 회색 일자바지 차림을 하고 있을 이 여성은 눈가주름과 미간주름의 깊이를 따져본다면 온화한 측에 속한다. 보름 전날 밤 나를 바라보던 그 순간만 제외한다면. 그랬구나, 몰랐네, 미안하다. 그날 내가 그녀에게 바란 건 겨우 이 세 마디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냥 내가 죽고 싶어. 글자로 가두어 뒀던 말을 음성으로 뱉는 순간, 말들이 눈과 같아서 사람에게 닿는 순간 무게도 없이 그대로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나와 한 블록 걸어가 버스정류장에서 아무 번호나 올라 이름 모를 도로의 중간쯤 빨간불에 멈추고 난 다음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그 말까지는 하면 안 됐었다고, 적어도 그렇게 도망쳐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는 생각이 든 건 한 계절이 덮인 후였다. 희미한 붉은 빛이 물들이는 하늘이 아닌 빨갛게 타버려 하얗게 남은 해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의 내부에 있는, 아주 가까운 것들로부터 더 이상 도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톱 옆 거스러미를 물어뜯다 찢어진 살점 사이로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을 응시하다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피는 왜 아픔을 동반하는가.


 그러니까

 피는

 왜

 빨강인가.


하루동안 본 붉은 것들을 글로 이었다. 빨강은 왜 아플까. 세상은 왜 빨강으로 가득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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