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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림 Dec 08. 2022

피에 담긴 것

RH-O형의 헌혈기

 미워하는 마음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때가 있다. 나에게는 헌혈이 그랬다. 바늘을 무서워한 것도 아닌데 헌혈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봉사시간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음에도 피를 뽑을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고, 대학교 안으로 들어온 헌혈 차에서 영화표와 이온음료를 전리품처럼 들고 나오던 동기들을 보면서도 나와는 다른 세계라고 여겼다.


 나는 우리나라 인구 1,000명 중 단 4명의 사람만이 보유한 RH- 혈액형이다. 생명과학을 공부했다면 ABO 혈액형처럼 항원의 유무로 결정되는 혈액형일 뿐이며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걸 알지만 부모님을 포함한 RH+의 사람들은 나를 심각하게 조심해야 할 희귀병 환자처럼 여겼다. 때로는 한 번 피가 나면 잘 멈추지 않는 혈우병 환자로 착각하는 친구들도 있어 속으로 과학시간에 잤니?라는 말을 삼키기도 했다. 귀한 피라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헌혈을 아주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으로 봉인했다.


 그렇게 지켜온 경계를 깨뜨린다면 그것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희생이나 소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타심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의 첫 헌혈은 보람과 긍지보다는 분노와 파멸의 잔해였다. 사람을 싫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며칠 밤을 새우는 졸업작품을 하면서도 속상하다는 말이 끝이었던 내가 입사 후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온갖 욕을 섭렵하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사는 남은 일정과 업무량과 상관없이 야근을 강요했고, 회의를 가장해 자기 말만 해대며 업무시간을 뺏는 일이 일상이었다.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남의 노력은 폄하하는 그는 분기별로 사람을 세워두고 “일하기 싫어? 나는 주말에도 출근했어.”라는 말로 사장인 자신과 월급쟁이인 직원에게 같은 책임감을 요구했다. 10,000명 중 4명 있을까 말까 한 사고방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진짜 마이너스(-) 인간이었다. 전문 지식이나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보면서 내 속에서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싫어할수록 불은 거세져 몸과 마음을 전소시켰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불덩이를 내뿜을 수 있을 것 같던 날, 내 세상이 불바다가 되기 전 뭐라도 몸 안에서 빼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나의 첫 헌혈이었다. 불 대신 빠져나온 붉은 피.


 문진실에 앉아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고 나서야 헌혈을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헤모글로빈 수치를 확인해 헌혈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오면 손목에 이름과 혈액형, 바코드가 출력된 종이띠를 두른다. 기본 설정 때문에 이번에는 RH+로 적혀있지만 다음부터는 RH-로 표시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마음에 걸렸다. 채혈 전 RH+ O형 맞으신가요? 하고 묻는 간호사에게 RH-이지만 처음이라 다르게 적혀있다는 설명을 늘어놓으며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걸 은연중에 계속 드러내고 싶어 했다. 결국 다 뽑아내면 붉은 액체가 담긴 한 팩일 뿐인데. 그것도 분노와 혐오, 과시로 뭉쳐진.


 나는 헌혈이라는 단어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지냈던지 헌혈증서와 기념품이 별개라는 사실을 모르고 어떤 기념품을 받았을 것이냐는 물음에 헌혈 기부권을 골랐다. 헌혈 기부권을 수혈받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헌혈증서로 착각한 것이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진실을 알게 되었고, 받지 못한 문화상품권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기부권으로나마 불순했던 마음을 미화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며칠 뒤 대한적십자사에서 RH- 헌혈을 독려하기 위한 등기가 왔다. ‘0.4%의 기적’, ‘숭고한 박애정신의 실천’, ‘귀중한 생명’ 같은 단어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나는 기꺼이 RH- 긴급 참여에 동의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어 버린 부정의 감각들이 누군가에게는 어찌해야만 하는 희망과 분투의 대상이라는 괴리감을 애써 외면한 채.


 그 이후로도 종종 몸이나 영혼 어디에 남은 불씨가 타닥타닥 타오르긴 했지만 예전만큼 불길이 거세진 않았다. 과학적으로 터무니없는 이야기겠지만 헌혈의 효과라고 믿고 싶었다. 두 달이 지나자마자 다시 헌혈의 집으로 향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대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이날은 문진실에서 나의 혈액형을 확인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의자에 앉아 기념품을 고르는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간호사는 RH- 혈액이 급하게 필요한 곳이 있어 바로 이송한다는 설명과 함께 막 뽑아낸 따근따근한 혈액팩을 가져갔다. 혈액팩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의 혈액을 기다리고 있을 그가 누구이고 어떻게 위태로운지는 모르지만 나와 같이 다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남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시작한 헌혈이었는데 결국 남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변했다.


 이제 나는 부정의 감정을 놓고 헌혈을 할 수 있다. 오늘 다섯 번째 헌혈을 하면서 생각해보건대, 나는 첫 번째 헌혈을 하러 가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나를 위해 한 행동이 남을 살리고 결국은 나도 구원한다는 비상식으로 혼란스럽지만, 나는 이런 혼돈 속에 살아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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