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파트너>
여자에게 '너는 나의 섹스 파트너야' 라고 말할 때 섹스에 응하는 여자는 몇이나 될까. 사랑이라는 말을 섹스 이후에 하는 습관이 생겼다. 섹스를 하고도 혹독하게 그 말을 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면밀히 분석해보면, 섹스를 했음에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이제 가버려, 가버려' 밥을 먹던 얼굴을 빤히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의 일은 묘연한 일이 많았다.
사랑을 할 때, 사랑하고 있는지 알지 못 했던 일들이 있다. 다 지나간 여름의 어느 하루, 가을의 찬바람이 얇은 티셔츠 사이로 들어와 살갗을 시리게 농락할 때야 나는 여름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뜨거웠던 사랑은 사랑하는 내내 나를 미치게 만들었고, 사랑인지도 모르고 다 지난 후에 깨달았던 사랑은, 사랑을 잃은 후에도 여름의 두통처럼 나를 날카롭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미치게 만들었던 사랑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계속 먹을 수밖에 없는 맛 집의 매운 냉면처럼, 차갑지만 속이 불에 타버리듯 얼얼하고 한입만 먹고 멈추기엔 허기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 기어코 다시 한 젓가락을 들게 하는 중독되는 맛이다. 게다가 다 먹은 후엔 어떤가. 마치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린 사람처럼 그토록 고통스러웠음에도 맛있다며 퉁퉁 부은 입술로 찬양하지 않던가. 뜨거운 육수를 마신다. 진한 풍미는 얼마를 우렸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얼얼했던 입은 차가운 냉수보다 따뜻한 육수에 온천욕을 하듯 입 속살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육수가 바로 다 지난 후에 느낄 수 있던 사랑과도 같은 맛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제 냉면집에 가면 육수를 먼저 마시는 습관이 있다. 아니, 육수가 맛있는 집이 냉면도 맛있다. 매운 냉면은 위가 약한 나에게 좋은 음식이 아니다. 몸에도 특별히 좋은 음식이 아니다. 단지, 내가 세상을 살면서 맛본 하나의 음식일 뿐이다. 먹고 싶어지는 음식도 물론 있지만, 감각에 진실한 것을 죄로 인식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육체적인 결합이 없이 사랑을 운운하기에 나는 조금 많이 쾌락을 알게 되었고 간판만 그럴듯한 가게에 들어가 거짓 찬양을 하지 않는다.
감각은 아주 정확한 판단을 하게 두지는 않지만, 내가 사고할 근거는 감각에 기인한다. 고로 지금껏 느꼈던 감각을 하나의 맛으로 치부하기로 한다. 결국은 뇌의 일, 네가 어루는 깊은 침실을 맛 본다. '섹스 파트너야' 라고 말해도 괜찮아,
식욕을 일으켜준다면.
오래 전 페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식욕을 일으키는 사람 없음.
자칭 맛집이라고 간판 붙인 집, 제일 믿을 게 못 된다로 귀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