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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랑 Nov 05. 2022

쾌락의 여정



몇 번 오르가즘을 좀 늦은 나이에 경험했다고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 이유가 상대방과의 소통이나 배려 혹은 기술적인 부분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에야 드는 생각은 타인에 대한 정신적 관여였던 것 같다.


첫 번째 오르가즘을 느꼈던 날에는, 오르가즘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측은하게 느꼈던 전 남자친구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고, 그 노력으로 장벽을 깰 수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섹스의 관점은 '서로 즐길 수 있는 육체' 가 되는 것이었는데, 혼자서 기분이 좋으려면 차라리 자위가 낫다는 논리였고 부디 '함께 즐기는 섹스' 를 공유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 역시 수동적인 쾌락의 동기로 시작되었지만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 가깝고 싶었다. 삽입을 했을 때의 질감이랄지 밝히는 여자에 대한 비난이랄지, 머리에서 지우려고 해도 관계를 하는 내내 나는 그 생각을 조금도 덜어내지 못했었다. 지금도 개중에는 처녀의 성을 운운하는 남자들이 있지만,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게 될 때마다 나는 헌 여자의 꼬리표까지 그들에게 들키는 일이 부끄러웠다. 오히려 이혼을 하고 새로운 교제를 시작했을 때야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의 오르가즘도 이혼 후의 일이었다.


그 상대가 사정을 목표로 섹스에 임했다면 지금까지도 나는 오르가즘이 뭔지 모르는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나'에게 갖힌 나를 열기 위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과 반응을 살폈다. 일단 이 부분에서 지금에야 드는 생각은 내가 내 몸에 얼마나 무지했던가 였고 남자의 사정이 섹스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섹스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첫 번째 오르가즘을 경험한 후 시간이 좀 지나 친구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는데, 결혼 후 아이를 둘이나 낳았던 친구나 미혼인 친구, 신혼인 친구 모두 오르가즘의 경험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간간이 자위를 시도하며 오르가즘이 보다 쉬워졌던 나는 '네가 너의 집을 모르는데 어떻게 남자에게 바래다 달라고 말할 수 있느냐' 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실제로 여자들의 자의식에서 밝히는 여자를 배제하기에 아직은 여성과 남성의 우위의 압박을 피해 가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위를 가끔 즐기게 된 그때조차도 클리토리스의 쾌감에만 의존했었고 삽입 섹스를할 때도 통증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가끔 포르노를 볼 때 클리토리스가 닿지 않는 삽입에 반응을 보이는 여자들을 보면 내 몸이 이상한지 그녀들의 반응이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도 능동적인 반응에서는 좀 멀리 떨어져 있던 것 같다.


먼저 섹스를 하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용기를 얻으려면 상대방이 갖고 있는 나에 대한 감정도 알아야 할 테고, 거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도 벗어나야 할 테고, 섹스를 했을 때 봉사가 아닌 내가 얻을 기쁨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기에 아예 제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을 끌어안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위를 하는 날이 많았는데, 어느 날엔가 클리토리스에서 쾌감 대신 통증이 느껴졌고 불쾌감이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날 이후로 몇 차례 시도를 했지만 마찬가지로 쾌감보다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상실감이 컸지만 인터넷을 뒤져봐도 같은 증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간혹 오르가즘 통증이라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르가즘을 느낄 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시달린다는 다른 부위의 통증이었다.   


어느 날엔가 꿈을 꿨다. 꿈을 꾸는 내내 몸을 타고 환한 빛이 순환을 했고 환한 빛이 닿는 곳마다 굉장한 희열이 느껴졌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고 그 빛이 중심 부위로 향해갈 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졌다. 정신을 집중했고 꽤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는데 갑자기 강아지가 짖기 시작했다. 꿈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곧 실패했다. 눈을 뜨고 난 뒤 허탈감에 침대에 걸터앉아 쾌감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 때와 알게 된 이후의 변화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없이 살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오르가즘으로 얻는 기쁨과 균형은 삶의 작은 부분은 아니었다.


며칠 뒤에 다시 한번 자위를 시도했고 전폭적으로 클리토리스에 의존했던 자위에 변화를 주었다. 다른 부위를 자극해보았다. 무감각한 줄 알았던 클리토리스의 아랫부분과 질구에서 모를 듯 좋은 기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날 조금 오랜 시간을 들여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지 않고도 오르가즘에 성공했고, 한 달 쯤 뒤에는 클리토리스도 정상적인 감각이 돌아왔다.


질구나 질 내부 등 여자들의 성기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내가 역시 절정만을 느끼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면 여전히 클리토리스에만 국한된 쾌감에만 의존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서론 본론 결론과도 같은 진행이 성기에서도 진행이 된다고 믿는다. 시동을 거는 부위가 있으면 운전을 하는 부위가 있고 폭발할 때 사용해야 하는 기관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도 전립선이나 고환으로 느끼는 부분도 적잖은 것으로 알고 있고 나 역시 섹스와 오르가즘에는 큰 자극을 갖고 있는 감각만이 전부인 줄로 알았지만, 실제로 오르가즘은 섹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희 자체로서의 사람 대 사람의 열정으로 빚어지는 섹스를 즐길 수 있으려면 자신의 굽어진 성 정체성을 피해자가 아닌 능동적인 쾌락의 주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섹스의 본질보다는 쾌감에만 몰두한 사람들이 많기에, 이다지도 섹스는 큰 오명을 가득 안고 있는 것 아닐까. 섹스는 두 사람이 관여하는 일이기에 두 사람이 평등의 선상에서 서로 돌볼 때 최선의 섹스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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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페북에 올렸던 글인데 과거의 오늘에 올라오는 내용 중 괜찮은 것들만 브런치에 공유해보기로 했다.


애도 기간이지만, 이것도 사람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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