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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랑 Mar 16. 2022

빛바랜 골목에서

어젯밤엔 박효신 노래를 들으며 마실을 다녔다. 한 곳으로 반듯하게 몰아넣은 게 아니라 각각 흩어져있는 그런 무드, 여기에 있다. 쇠락한 양반네의 마지막 외출 길에 내리는 부서진 햇살 조각이랄까. 찬란한 영광이 한 번은 휩쓸고 지나갔을 자리에 빛바랜 채로 남은 것들, 이름 한번 없이 부서진 것들이 가로등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의 이야기란 뭘까. 또 그런 방대한 질문에 오랜만에 나를 던진다. 그래서 이야기로 인간이 행복해지는 걸까. 


다 벗어던지고 어디로든 훌훌 털고 떠나고 싶을 때마다 무섭고 겁나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것도 아닌 김치. 그것도 적당히 익어 시큼한 냄새가 나는 김치를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었더랬다. 앞으로 여행자로 살 수 있어도 망명자가 될 순 없겠다며 김치에 코를 박고 체념한다. 이제 내 인생엔 배신도 존재할 거다.


그러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는데 뜨개방이 보였다. 유치원이 끝나고 시장 안 뜨개방에 엄마를 찾아갔더니 엄마는 큰 코바늘로 스웨터를 짜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었다. 근데 그 표정이 아직도 나는 거 보면 엄마가 정말 예뻐 보였나 보다. 그해 나는 엄마가 짜주신 거니?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다. 팔 부분이 날개처럼 한단 더 들어가게 짜준 스웨터는 오로지 엄마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다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웠던 엄마의 행복했던 표정, 엄마는 기억 못 하는 엄마의 아름다웠던 젊은 날.

그리고 철없는 여자에게 사랑받았던 내 어린 시절.


아주 한참이 지난 지금, 엄마와 김치, 그리고 보광동 골목길에서 내가 박효신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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