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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영 Apr 03. 2024

            종이학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의든 타의든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행복과 불행을 가름하는 단초가 되기도 하기에 인생살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어른들보다 자그마한 일일뿐 미묘한 감정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의 상황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초등학교 때 나와 함께 동화책을 출간하기도 한 손녀가 중학교에 입학하며 또래들의 작은 고민들을 글로 엮어 보내왔다.  손녀의 글을 읽으니 새삼 어린 시절의 순박했던 일들이 떠올라 그리움으로 먹먹해진다.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훑기 시작했다. 새 학기 쉬는 시간이란, 누가 먼저 친구를 사귈 것인가에 대한 서로의 심리전인 것이다. 지금 내가 어떤 사람과 말을 걸고 친해지는가에 따라서 학교생활의 자그마치 1년이 달려 있는 것이다. 정확히 한 3분 정도가 지나자, 여기저기서 대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만을 대비해 새 책가방을 사고, 새 필통에 필기구에, 심지어 친구 사귀기에 필수라는 간식까지 주머니에 넣고 학교에 갔건만 역시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나로서는 어려웠다. 쉬는 시간의 후반쯤 되자 누가 누구와 친해졌는지가 뻔히 보일 정도로 서로서로의 대화 상대는 정해져 있는 듯 보였고, 어디에도 내 자리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 정도의 상태가 되자, 결국 포기를 한 나는 그저 자리에 서서 멀뚱멀뚱 남들의 뛰어난 친화력에 감탄하는 짓도 그만하기로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속된 나의 소심한 천성은 어디 가지 않은 듯했다. '올해도 그렇게 친구 하나 없이 보내겠구나.' 하고 체념한 나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분 뒤, 학교 스피커에서 “쉬는 시간 1분 남았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리자 여기저기에서 들리던 대화 소리는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변이 조용해지니 책을 읽기가 더 편해져 빠르게 다음 장을 넘기려는 찰나, 눈앞에 새빨간 종이로 곱게 접은 종이학이 보였다. 흠칫 놀라서 쳐다보니  단정한 곱슬머리의 한 여자애가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의 정적이 흐른 뒤, 그 여자애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친구 하지 않을래?” 청아하고 밝은 목소리에 홀려 얼떨결에 종이학을 받자,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쳤고 그 여자애는 내 자리와는 좀 멀어 보이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입학식이라 그런지 눈에 띄게 어색해 보이는 담임 선생님과 대충 인사를 한 뒤 교장 선생님의 여러 훈화 말씀을 듣고 학교는 우리를 집으로 보냈다. 나는 자리에서 허무하게 일어나 새 책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진한 갈색의 성숙한 책가방이었는데, 지금 보니 문득 아까 그 여자애의 머리 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서랍에 넣어놨던 빨간 종이학이 떠올랐고, 서랍에 손을 넣고 찾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아까 우리 친구 하기로 했지?” 그 여자애였다. 여자애는 팔을 열심히 휘저으며 종이학을 찾는 나를 뻔히 보더니 싱긋 웃었다. 마침내 종이학을 찾아 꺼낸 나에게 살짝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 손을 살짝 잡으니 그 여자애는 기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갔다. 학교 문을 나가면서 알게 된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걔의 이름이 진보람이라는 것과, 나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 전화번호를 내 폰에 찍어준 뒤 집으로 들어가던 그 여자애는 나에게 윙크를 한번 날렸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진보람은 입모양으로 ‘내일 학교 같이 가자는 뜻이야.’라고 했다. 그다음부터 내 생활은 온통 진보람과 함께였다. 등하교는 물론이고, 쉬는 시간마다 직접 적은 종이를 내게 넘겨주는 행위는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진보람은 늘 그 소심한 나를 데리고 다니며 함께 지내주었다. 진보람이 나에게 접어주는 종이는 항상 달랐다. 첫날처럼 종이학을 접어주는 날도 있었고, 가끔은 하트모양을 접어주거나 종이배, 종이비행기, 어떨 때는 어려워 보이는 것도 여러 개 접어주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버렸을 테지만, 버리기 너무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접은 종이들을 보니 그럴 마음이 없고 하나하나 구겨지지 않게 집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방은 어느새 점점 알록달록한 무지개 방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진보람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시간이었지만, 진보람이 그만큼 나를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해서 나는 그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진보람은 왜 내게 이렇게 많은 종이를 접어서 주는 걸까? 진보람이 그저 나를 좋아해서 그렇다던가 하기에는 진보람이 접어주는 종이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도 매일매일 쉬는 시간마다 하나씩 접어주던 지난 세월에 비하면 요즘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접어주는 편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벌써 초가을이다. 지금이 될 때까지 꾸준히 종이를 하나둘 접어서 나한테 주는 건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정성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진보람의 종이접기 실력은 꽤나 뛰어났다. 항상 꼭짓점과 모서리는 반듯했고, 마치 종이접기 교본에 삽입되어 있는 예시 사진과 같은 실력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진보람의 종이접기 실력이 뛰어나서도 있겠지만, 누구나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반듯한 종이를 접기 위해서는 시간이 적지 않게 들 것이라는 걸 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의문이 금요일, 학원이 끝난 시간에 든 바람에 나는 보람에게 바로 나의 의문을 털지 못하고 끙끙 앓으면서 주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연락처야 물론 있었지만, 여태까지 나한테 종이를 접어준 그 애의 성의가 있지, 이런 이야기를 메신저 하나 달랑 보내놓는 것은 너무 정 없는 행동처럼 보였다. 월요일이 되고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되자, 진보람은 평소처럼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 8시 10분까지 아파트 분수대에서 만나.’ 진보람은 메신저 말투를 굳이 꾸미거나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나는 오히려 그런 꾸밈없고 솔직한 면모가 마음에 들었다. ‘응.’ 답장을 보낸 후에 나는 천천히 준비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준비 시간이 길어져서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은 5층이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지, 계단을 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이 드는데, 이렇게 오늘 같이 약속에 늦은 데다가 엘리베이터가 12층까지 올라가 있는 날은 그저 뛰어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헐레벌떡 나가자 진보람은 분수대에서 나를 반겨주며 주황색 종이 튤립을 내밀었다. “늦게 온 벌이야!” 그 종이를 보자마자 내가 주말 내내 품고 있던 문제가 생각난 나는 학교로 함께 걸어가며 진보람에게 물었다. “근데, 넌 왜 나한테 종이를 이렇게 많이 접어주는 거야?” “그야, 별 이유 없지.”라고 말하며 진보람은 나에게 윙크를 날려주었다. 그 뜻은 무조건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순수하게 이유가 없었다면 그런 행동을 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진보람은 자잘한 행동에까지 의미 부여를 하는 애였기 때문이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접고 벌써 도착해 버린 우리 반의 구석으로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진보람이 날린 회심의 윙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날은 학원에서 집에 가던 날이었다. 아직 가을이 되려면 조금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해가 지기 시작해 의아해서 시계를 보니 꽤 저녁이었다. 학원에서 보충을 하면 시계를 볼 틈도 없이 허겁지겁 공부를 하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이런 상황이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걷기 시작했다. 원래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는 좁은 벽돌 골목을 지나 바로 집에 갈 수 있지만, 오늘따라 공터 쪽으로 돌아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어 실행으로 옮기게 되었다. 공터 쪽으로 걷다 보면 노을이 지는 풍경을 잘 볼 수 있는 계단이 하나 있더. 걷다가 보니 갑자기 그 계단이 떠올라 흘깃 훔쳐보니  그곳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슬픈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지나치려는 찰나, 나는 울고 있는 그 여자아이의 머리칼이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을 따라 갈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틀림없는 곱슬머리였다.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터무니없는 생각을 외면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눈을 비비고 다시 계단 쪽을 노려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날아다니던 ‘설마’가 맞았던 것이다.  보람이 그렁그렁한 눈가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입고리를 귀에 달고 다니던 보람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는 괜히 당황해서 책가방을 팽개치고 그 옆 계단에 꿇어앉았다. 보람이 내가 이 학원을 다니는 걸 어떻게 알고 이 공터에서 울고 있었을까 곱씹어보고 있던 순간,  보람이 나와 같은 아파트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 황당해하던 나를 보람이 살짝 잡아당겼다. 울고 있던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진보람의 응징이었다. 나는 지각했을 때 벌로 받은 튤립을 떠올리며 진보람이 내게 내리는 벌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생각과 함께 진보람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무슨 슬픈 일 있어?” 어떤 말로 위로를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내가 나직하게 묻자 진보람은 나를 몇 초간 노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눈물을 간신히 삼킨 후 간신히 대답했다. “윙크... 해줬잖아.” 눈치가 빠른 편인 나는 그즈음에서 진보람이 왜 토라져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미안, 내가 그 윙크는 못 알아들었어.” 내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진보람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답을 해줘야지, 내 종이접기 말이야.” 울다가도 종이접기를 찾는 진보람에게 감탄을 하다가 보니 요즘은 진보람이 내게 종이를 안 접어주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종이 접기에 답을 해줘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됐어.” 진보람은 마치 포기한 듯이 말하고선 외마디 한숨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 애를 나는 뒤에서 멍하게 쳐다보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무지갯빛으로 물든 나의 방 문을 발칵 열고 들어가 여태껏 받은 종이들을 모두 찾아보기 시작했다. 평소 정리를 좋아하는 나는 받은 날짜에 따라 종이들을 구분해서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모두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종이들은 역시나 엄청나게 많았고, 하나의 무더기라고 봐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나는 책상에 앉아 종이들을 펼쳐본 뒤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진보람의 윙크를 해석할 수 있는 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첫날에 받았던 종이학을 손에 들어보았다. 종이학은 지금 보아도 멀끔하고 예뻤다. 이 종이학의 후로도 더 예쁘고 번듯한 것들을 적지 않게 접어주었지만, 나는 어쩐지 첫날에 받은 이 종이학에 담긴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아서 가장 좋아했다. 종이학을 들고 추억에 잠겨있던 나는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종이학의 아랫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구겨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보람에게 받은 종이를 아기 대하듯 소중히 대했기 때문에 내가 구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호기심에 종이학의 아래를 살짝 열어보았고, 그곳에는 정말 충격적 이게도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라고 적혀있는 것을 유심히 보던 나는 순간적으로 벼락에 맞은 사람같이 다른 종이들을 허겁지겁 열어보기 시작했다. ‘랑’, ‘친’, ‘구’ 등등 여러 글자가 어딘가에 하나씩 적혀 있었다. ‘나랑 친구 해줘서 고마워.’라는 문장을 발견한 나는 더더욱 빠르게 종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열고, 옮겨 적고, 열고, 옮겨 적고,...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된 후, 나는 마침내 보람이 나에게 선물로 준 하나의 장문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보람의 마음이 아주, 아주, 아주 진하고 걸쭉하게 담긴 편지, 보람의 함박웃음이 그대로 담긴 그 편지를 보며 나는 두둥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조합하느라 새버린 밤이었지만,  나를 생각하며 한 글자씩 종이에다 접어서 준 보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해 마치 잠을 잔 것처럼 포만감이 들었다. 편지 한마디한마디를 곱씹으며 천천히 읽은 뒤 나는 첫날, 그 종이학처럼 새빨간 도화지에 그 편지에 대한 답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친구에 대한 내 마음을 누구보다도 세심하게,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글: 한재원

그림: 이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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