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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Choi Feb 24. 2024

Big Picture Disease

사생대회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포도나무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보고자 마음먹었다. 내가 그린 그림 속의 포도나무를 쪼아먹기 위해 새가 날아올 정도로, 리얼한 그림을 그려보고자 했다.

한참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옆 사람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이봐요, 그렇게 그림 그리면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을 했다.

"사실주의 그림은 몇 백년 전에 이미 유행이 지난 미술사조예요. 너무 없어보이잖아요. 현대미술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 대상이 실제로 그러한지를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 한계가 반영되어야 하며....(블라블라) 그래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고, 수상은 꿈도 꿀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가 말하는 '현대미술의 트렌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것과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를 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냐고 물었고, 그는 또 다시 여러가지 용어를 섞어가며 약 5분에 걸쳐 혼자 떠들어댔다.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그가 그리려는 그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없지만 있어 보이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포도나무같은 작은 피사체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웅대한 우주적인 것(정확히는 우주적인 느낌을 주는 실체가 없는 것)을 그리려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첫째, 이 대회에 제대로 된 심사위원이 있다면, '있어 보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작품'은, 그저 겉을 흉내 내기만 한 속빈 강정이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둘째, 만약 심사위원 중에 그것을 가려낼 안목을 가진 자가 없다면, 그의 작품은 통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작품도 통과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의 통과 여부와 내 작품의 통과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셋째, 설령 내 작품이 통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모든 일이 그렇듯, 잘될 수도 있지만 잘 안될 수도 있는 것이고, 반대로도 참이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내 그림을 최선을 다해 완성시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내 그림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옆에서 계속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혀도 끌끌 차면서.

나는 제발 그가 말을 멈추고 본인의 그림이나 그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줄텐데, 왜 자꾸 말만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Fuck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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