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는 마치 10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남자고 여자고 10대 때 친구들과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 그게 하찮더라고 막 열띤 이야기 나누고 까르르 웃고 했던 바로 그 기분 말이다.
션에게 전화가 와서 이틀째 <에반게리온> 이야기를 한다. 이틀 나눠서 드디어 정주행을 마쳤나 보다. 첫날 절반 정도 보고 나서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하길래, 내 기억에 에반게리온 마지막 편이 2, 3개 버전이 있었던 것 같아서 (TV판, 극장판) 이야기해 줬더니 오리지널 버전으로 볼 거라고 하더니만, 정주행 마치고 나서는 극장판도 봐야겠다고 했다.
다시 잠시 에니의 세계에 대해 열띤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이들이 읽을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그리 가리지는 않다 보니 여러 장르를 읽었는데, 만화책도 있다. 고등학생 때까지 꽤 많은 만화책을 섭렵하며 살았다. 요즘은 웹툰이 대세지만, 어릴 때 읽었던 만화책이 그리울 때가 있다.
<에반게리온>은 마치 어릴 때 본 것 같은 착각이 있으나, 생각해 보니 션파와 함께 집에서 비디오로 봤었다. 지금은 사라진 '비디오테이프'말이다. 션은 낳기 전이었으니 신혼 때 봤다는 건데, 2000년 전후해서 봤나 보다. 션파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특이하게도 이 비디오테이프는 션파가 친구에게 빌려왔었는데 션파는 기억을 전혀 못하고 있다.
오래되어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에반게리온의 분위기와 세계관에 푹 빠져서 상당히 감탄했던 것 같다.
다시 찾아보니 1995년~1996년에 방영되었던 작품이었다.
가바사와 시온의 <당신의 뇌는 최적화를 원한다>에서 저자가 호르몬들을 에반게리온의 캐릭터로 비유한 것을 보고 주인공 '레이'가 떠올라서 반가웠다.
션 : ㅋㄱㅋㄱㅋㄱ 나중에 에반게리온 같이 보자! 진짜 내 커먼 앱 같은 애니네, 이것보다 몇천 배 더 고뇌하고 만들었겠지? 진짜 명작이네, 앞으로 한 100년쯤 지나서 애니 기술이 발전해도 얘는 이미 그 위상이 레미제라블급 아니야?
깡지 : 이미 명작이고 전설이야. 그런데 모든 사람이 만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애니계의 명작'이지.
션 : 그러게 아쉽구려..
이후 다시 에니에 대한 이야기 이어지다가 아키라 이야기로 넘어갔다. 내가 초등학생 때 <아키라>를 만화책으로 접했는데, 그리 어렸을 때도 아키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이었다. 염세적 세계관, 암울한 미래, 주요 캐릭터들의 충격적인 결말, 그리고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역동적인 구도'와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였다.
그 어린 시절 단 한 번 본 만화였으나 워낙 강한 인상을 받아서 수십 년이 지나도 기억을 하고 있었다.
션이 중학생 때 코엑스 만화방에 데려간 적이 있다.
(메가박스 옆 계단 아래에 조그만 공간에 만화책들과 테이블을 뒀었는데,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다. 왜 없앴냐고!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코엑스 숨은 공간이었는데)
그때 션에게아카라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들 문제집 슬그머니 들이밀면서 풀어보라고 할 때인데, 나는 만화책 슬그머니 들이미는구나 해서... 내용이 밝고 희망찬 미래를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만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주는 이 작품을 본 션의 반응도 궁금했다. 션 반응도 나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