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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Apr 12. 2024

어라운드 매거진

행선지 없이 이야기만 오고 간 산책길에서, 우연히 들어간 열 평 남짓한 서점에서.


"이 책 참 좋은데요?"


그냥 걸었다. 여느 겨울날과는 다르게 따뜻한 공기였다. 건물에 반사되는 색감은 노랑빛을 띠었다. 합이 잘 맞는 둘은 금세 카페를 마감하고, 어정쩡하게 붙잡힌 나는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쓰레기를 버렸다.


"이제 뭐 할 거예요?"

"나온 김에 산책이나 하고 들어가려구요."

"오 산책!"

"우리도 같이 가요."


합이 잘 맞는 둘은 그렇게 나를 덥석 물고선, 걸었다. 갑작스레 생겨버린 일행에 나도 수줍게 신이 났다.


둘은 한참 나를 꼬셨다. 같이 일하자며. 긴 머리를 한 로스터와 수염을 기른 바리스타. 머리를 맨들맨들하게 밀은 나까지 같이하면 완벽하지 않겠냐며. 당시 나는 복학을 할 것이냐, 1년 휴학을 더 할 것이냐 고민 중이었다. 학교는 졸업을 해야겠고, 커피 만드는 일도 제대로 해보고 싶고, 당장 선택권이 주어지니, 이내 감당하지 못하고 숨어버린 나는 어영부영 복학을 해버렸다.


아마 그날이 마지막이었을 거다. 아마 그날로 복학을 결정했을 거다. 왜 그날이었을지, 커다란 이유는 없다. 나는 그저 결정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분명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끝끝내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나를 반겨준다. 졸업하면 같이 일하자고 농담을 던진다.


그런 날이었다. 별 다른 일정 없이, 목적 없이, 행선지 없이, 셋이서 걸었다. 천변을 따라, 이어지 길을 따라 걸었다. 날이 따뜻해서 아무도 두꺼운 옷을 입지 않았다. 수염을 기른 바리스타는 일본에서 산 빔즈 모헤어 니트를 입었다. 엄청 싸게 샀다고, 연신 자랑을 했다. 긴 머리 로스터는 회색 후드에 베이지 치노를 입었고, 양손에는 털장갑을 꼈다. 겨울이면 머리 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비니를 고쳐 쓰고 날이 따뜻해서 좋다고 말했다.


걷다가 한 갤러리에 들어갔다. 뉴욕의 타임스퀘어 그림을 보고 머리 긴 로스터는 본인이 저기 있었다며 흐뭇해했다. 갤러리 주인장은 커피를 내려줬다. 나와 수염 난 바리스타는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머리 긴 로스터는 레몬생강차를 마셨다. 나와 수염 난 바리스타는 아메리카노를 고른 것을 후회했다.


다시 걸었다. 천변을 따라 걷다가, 골목골목을 굽이지다가, 여기저기 간판들. 전주 시내를 빼곡히 아는 바리스타와 로스터는 여기는 뭐가 맛있고, 저기는 언제 문을 열고, 주인장은 어떻고를 콕콕 집어줬다. 그렇게 걷다가, 서점으로 들어섰다. 열 평 남짓 되는 독립서점. 주인장 취향대로 골라낸 책장은 그를 닮았다. 반층짜리 지하에는 문구를 팔았다. 문구들 역시 그를 닮았다. 종일 이야기를 뱉어낸 셋은 이내 자리를 잡고 책을 훑는다. 훑다가, 톺았다.


"이 책 참 좋은데요?"


머리 긴 로스터가 말했다. 촘촘한 텍스트 사이사이 사람들. 나도 그 옆에 서서 얼마간 그를 따라 읽었다. 책을 읽다, 책 두 권을 집었다. 머리 긴 로스터는 책 한 권을 선물해 줬다. 건물 밖을 나서고, 우린 호떡과 오뎅을 먹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결국 복학을 했고 그들은 여전히 재미있게 일을 하겠지. 사람을 알게 해 준 좋은 사람들이다. 함께하면 나도 덩달아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며, 하루하루가 팍팍하다 느껴질 때마다 종종 그들을 생각한다. 그들을 생각하다, 긴 머리 로스터와 수염 기른 바리스타를 생각하다가.


"이 책 참 좋은데요?"


뭐였더라, 책 이름이 뭐였더라.


그렇게 한 권을 사들이고, 두 권을 더 샀다. 읽는 내내 긴 머리 로스터와 수염 난 바리스타를 생각했다. 이 책에는 둘이랑 비슷한 사람들이 참 많네요.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 끝에는 좋은 글이 남는구나 생각했다.


하루종일 친구들과 목적 없이 누비다 진이 빠져 으슬으슬 집에 돌아가는 길.

몸은 노곤한데, 마음은 풍성해지는 기분.


사람이 그리울 때면 찾아 읽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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