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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May 09. 2024

그러니까 계속 말을 시키세요

내 아내의 모든 것

두현과 정인은 일본에서 처음 만난다. 두현은 약하게 난 지진에 겁에 질려 식탁 밑으로 숨어버린 정인의 귀여운 모습에 반한다.


저기요, 제가 밥 사줄게요.
이런 미인을 만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렇게 7년 간 이어진 결혼생활. 정인은 자신에게 소홀한 두현이 못마땅하고, 두현은 말이 너무 많은 정인이 버겁다. 두현은 정인과 헤어지겠다 결심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카사노바 성기를 찾아가 정인을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정인은 늘 불만이 많았다.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독설의 촉은 늘 두현의 귀로 향했다. 밥을 먹을 때도, 옷을 갈아입을 때도, 똥을 쌀 때도,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도, 하기야 대신 욕을 해주는 라디오 방송의 작은 코너까지 맡게 되는데, 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인이 두현은 부끄럽기만 하다. 그녀가 외로워서 부러 두현에게 스스로를 호소하는 것임에도 두현은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정인의 불만이 성기를 만나고 나서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정인은 이내 두현과 연애 초반처럼 차분하고, 삭삭한 사람이 된다. 그런 정인의 모습에 두현은 다시 마음을 열고 정인에게 다가가지만, 이번엔 성기가 정인에 마음을 쏟는다. 낌새를 느낀 두현은 불안한 마음에 둘의 관계를 의식한다.


살다 보면 말이 없어져요. 
한 사람과 오래돼 갈수록 더 그렇죠.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굳이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예요.
근데 거기서부터 오해가 생겨요.
사람 속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말을 시키세요.
그냥 내 주변 공간을 침묵이 잡아먹게 만들지 마세요.
침묵에 길들여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다만 저처럼 너무 부정적인 말은 금물이에요.
상대방이 지겨워할 수도 있거든요.


흔히 권태로움이라고 한다. 처음에 느꼈던 소중함은 이내 가벼운 공기처럼 사라지고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느껴지는 대상이 된다. 이미 나와 그가 서로에게 사랑의 흔적을 남겼는데, 되려 씻어내고픈 얼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씻어낸 사랑의 향기와 자욱은 다시 찾으려 해도 얼룩만 번진 흔적으로 남는다. 두 마음이 주고받은 대화는 사라지고 이내 적막한 침묵만이 흐르게 된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정인은, 그 권태를 이겨내고픈 정인은 두현의 귀에 피가 나도록 할 말을 쥐어짜 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희미해질 때 즈음 두현은 정인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다.


누구나 외로운 사람이 된다. 세상을 혼자 등에 업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순간이 있다. 철저히 혼자됨의 고독에서 빠져나가고픈 사람은 가시 돋친 말인 것을 알면서도, 상처를 주는 말임을 알면서도, 사랑을 호소한다. '나 힘들어', '외로워'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 마음을 되려 감추려고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 마음을 우리는 언제나 주고받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소중한 가족과, 둘 없는 친구와. 때때로 서로에 생채기를 주고 내면, 서로의 외로움을 발견하면, 상대방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아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줄로 착각한 두현은 점차 아내의 모든 것을 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인의 외로움을 두현 또한 홀로 마주하다, 이내 보듬어주지 못한 서로를 감싼다. 


너무 그립더라, 네 독설이, 네 목소리가.
옛날에 네가 투덜대는 거 정말 창피했는데,
근데 그거, 네가 외로워서 그런 걸 몰랐던 것 같아.
근데 내가 외로워보니까,
알, 알겠더라고.


두현은 다시 고백한다. 평생 시끄럽게 함께하자고.

왁자지껄 감히 외롭지 않게 살아내자고.


이런 미인을 만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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