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Wagner(1813-1883, 독일 라이프치히)
2012년 정명훈의 지휘로 콘서트 형태로 공연된 이후, 국내에서는 극의 형태로 첫 전막 초연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했다. 90분짜리 영화도 때로는 지루할 때가 있는데 총 5시간이 넘는 오페라를 감상하다가 객석에서 졸면 어쩌지, 퇴근하고 서울까지 겨우 올라갔는데 내내 힘들기만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완벽한 기우였다. 공연을 감상하는 내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3막으로 갈수록 정신이 더 말똥해지는 특이한 현상을 경험했으니.. 다른 오페라와는 달리 3~40분씩 긴 인터미션이 주어져 미리 준비해 간 간식과 와인도 여유있게 즐기고, 공연장 로비에 설치된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도 감상하면서 소소하게 연말 분위기까지 덤으로 얻었다. 설렘 가득한 공연장 나들이를 앞두고 저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 상기된 모습으로 미소 짓는 표정을 바라보면 덩달아 내 기분까지 환해진다. 무대 밖의 표정은 이런데 5시간 동안 무대와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를 해야하는 성악가들과 지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어떨까? 앉아서 감상만 하는 관객에게도 5시간이란 러닝타임은 솔직히 좀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하물며 연주자들에겐 이 작품이 얼마나 고될지, 클래식이 많이 대중화가 된 2025년 현재 이 작품이 국내 초연인 걸 보더라도 일단 무대에 올리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성악가들은 어떻게 5시간 동안 고난이도의 어려운 아리아를 소화하면서도 목이 쉬지 않고, 지휘자는 오랜 시간 팔을 휘저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가면서도 일정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물론 그만한 경지에 있는 연주자들은 힘든 걸 밖으로 표출하지 않을 만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단련되어 있는 프로들이겠지만, 몇 시간씩 무대에서 온전히 연주에 집중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노래의 매력에 빠져 성악을 전공하며 발성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때에는 배에 힘을 주면서 횡격막 근육을 단련시키는 게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참으로 오랫동안 굳건히 내 생각을 지배해왔다. 그런데 올해 하반기에 모교 동문들과 모처럼 서울에서 뜻깊은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짬을 내어 노래를 연습해야 했다. 예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름의 연륜과 통찰력이라도 쌓인 걸까? 시간을 쪼개어 연습에 매진하다가 새삼스레 득음을 한 것마냥 깨달은 게 있었으니, 필요할 때 힘을 주는 것도 틀린 방법은 아니지만 정말 좋은 발성과 연주는 불필요한 힘을 뺄 때 얻어진다는 것이었다. 힘을 주면서 뽑아낼 수 있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없다. 악기 연주자나 지휘자를 포함해서 과도하게 힘을 주면서 인정받는 세계적인 연주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클래식이나 오페라 연주를 들으면 괜히 나른해지고 잠부터 온다는 말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클래식은 사람의 뇌와 육체에 편안함을 주는 음악이다. 불필요한 힘과 긴장을 뺀 편안하고 안정된 소리는 인간의 마음에 여유외 회복의 리듬을 전달한다. 다섯 시간짜리 긴 오페라를 보는 내내 육체에 쌓인 긴장과 스트레스가 서서히 풀어지면서 뇌파가 일정한 주기를 찾아가는 것처럼, 중년에 접어든 내 삶도 악착같이 쥐고 있던 불필요한 힘은 훌훌 다 내보내고 조금은 더 가벼워지길 기대해본다. 이 오페라의 서곡이 작품의 배경으로 쓰였다는 영화 「멜랑콜리아」 도 조만간 한번 감상해봐야겠다.
멜랑콜리아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장인물
트리스탄(Tenor) - 코른월의 마르크 왕의 조카, 영웅
마르케(Bass) - 코른월의 군주
이졸데(Soprano) - 아일랜드 왕의 딸
쿠르베날(Baritone) - 트리스탄의 측근
멜로트(Baritone 또는 Tenor) - 궁정의 기사
브랑게네(Mezzo Soprano) - 이졸데의 시녀
목동(Tenor)
키잡이(Baritone) - 조타수
젊은 뱃사람의 목소리(Tenor)
합창: 선원들, 기사와 시종들, 이졸데의 시종 여성들
서곡(Vorspiel)
관현악 전주가 어둡고 긴장된 동기로 시작해 점차 고조된다. 막이 오르면 바다 위 배의 전경과 함께 먼 곳에서 젊은 뱃사람의 노래가 들려오며 장면으로 연결된다.
1막 1장
배의 선수에 마련된 천막 같은 방. 이졸데가 안락의자에 엎드려 있고, 브란게네가 가림막을 젖히고 바깥을 살핀다. 먼 돛대 꼭대기에서 젊은 뱃사람의 노래가 들려온다. 바람은 고향으로 불어가는데, “아일랜드의 아가씨는 어디에 있나” 하고 부르는 애조 띤 선창이다. 이졸데가 번쩍 일어나 모욕을 당한 듯 분노하고, 브랑게네에게 지금 어디냐고 묻는다. 브랑게네는 서쪽 하늘이 맑아지고 배가 평온하게 항해하여 저녁이면 코른월의 해안에 닿을 것이라 알린다. 이졸데는 단호히 “오늘도 내일도 아니다”라며 부정한다. 이졸데는 마법의 힘을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폭풍을 부르는 힘이 있었다면 이 배를 산산이 부숴 바다에 잠기게 하고 배 위의 숨결마저 바람에게 내주고 싶다고 격렬히 주문처럼 외친다. 브랑게네는 극도로 놀라 이졸데를 달래며 떠나올 때부터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인사도 없이 차갑고 침묵한 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창백하게 버텨 온 주인의 상태를 걱정한다. 무엇이 그를 이 지경으로 괴롭히는지 자신을 믿고 털어놓아 달라 간청한다. 이졸데는 숨이 막힌다며 문을 활짝 열라 명하고, 브랑게네가 급히 가림막을 걷어 바깥 풍경이 드러난다.
1막 2장
가림막이 젖혀지며 배의 갑판과 바다 수평선이 보인다. 중앙 돛대 주변엔 밧줄을 다루는 선원들이 있고, 우현 쪽엔 기사와 시종들이 쉰다. 그들과 떨어져 트리스탄이 팔짱을 낀 채 바다를 응시하고, 그 발치에 쿠르베날이 느슨히 기대어 있다. 돛대 위에선 다시 젊은 뱃사람의 노래가 들려온다. 이졸데의 시선은 곧장 트리스탄에게 꽂힌다. 속으로 “나에게 선택되었고 나에게서 잃어진 자”라 중얼거리며, 그가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고 브랑게네에게 저 자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 브랑게네가 “모든 나라의 경이, 칭송받는 영웅 트리스탄”이라 높이자 이졸데는 비웃듯 응수한다. “주인의 신부를 시체로 만들 뻔한 자, 여인 앞에서 비겁하게 시선을 피하는 자”라는 날 선 반어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을 즉시 부르라 명한다. 브랑게네가 우현 쪽으로 가 선원들 사이를 지나 그에게 전한다. 트리스탄은 정중히 답한다. 항해가 곧 끝나고 해가 지기 전에 상륙할 테니 왕의 신부를 마르케 왕에게 인도하는 임무를 다해야 한다고. 브란게네가 이졸데의 분명한 명령 “여주인의 두려움을 알라. 이졸데가 명한다”을 전하자 트리스탄은 지금 조타를 떠날 수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듣던 쿠르베날이 뛰쳐나와 거칠게 끼어든다. 트리스탄이 코른월의 왕관과 잉글랜드의 상속권까지 이졸데에게 맡겨도 그가 왕의 조카요 세계의 영웅인 사실은 변치 않는다고 떠벌이며 이졸데의 명을 따를 종이 아니라고 모욕에 가까운 맞짱 답변을 자청한다. 브랑게네가 분개해 물러서려 하자 쿠르베날은 조롱의 노래를 성량껏 퍼붓는다. “모롤드는 공물을 거두러 바다를 건넜다가 외딴섬에 묻혔고, 그의 머리는 아일랜드에 걸렸다. 이것이야말로 잉글랜드가 치른 공물! 우리의 영웅 트리스탄, 공물 치르기 참 기막히다!” 트리스탄이 그를 꾸짖어 선창으로 내려보내지만 배 안팎에서 남자들 합창이 같은 후렴을 받아 부른다. 조롱과 환호가 뒤섞인 승리의 노래가 갑판을 메우고, 이졸데는 굳은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1막 3장
무대는 다시 닫힌 커튼 안, 이졸데의 천막 안쪽이다. 이졸데는 절망과 분노 속에 몸을 일으키고, 브랑게네는 주인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다. 브랑게네는 “이 모욕을 견디다니”라며 통곡하지만, 이졸데는 스스로를 다잡고 단호히 묻는다. “트리스탄은 뭐라 했느냐? 모두 말하라” 브랑게네는 그가 정중히 말을 돌리며 “왕의 신부께 더 큰 경의를 표하느라 거리를 둔다”고만 했다고 전한다. 이졸데는 그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냉소 섞인 목소리로 되뇐다. “‘어떻게 안전히 마르케 왕의 땅으로 향하랴’ 아일랜드에서 빼앗은 공물의 값을 치르러 가는 길이겠지!” 이졸데는 참아왔던 과거를 쏟아낸다. 한때 ‘탄트리스’라는 이름의 낯선 상처 입은 전사가 아일랜드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그녀는 병든 그를 마술과 약초로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그러나 검의 흠집에서 그가 모롤트를 죽인 트리스탄임을 알아본다 - 모롤트의 머리에서 뽑아낸 파편이 트리스탄의 검의 깨진 자리에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분노에 치를 떨며 칼을 들었지만 트리스탄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연민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칼을 떨어뜨리고 그를 살려 보냈다. “그때 나는 복수 대신 자비를 택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은혜를 이렇게 갚았다.” 이졸데는 이어진 트리스탄의 배신을 고발한다. 자신에게 천 번의 맹세로 감사와 충성을 약속했던 남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른월의 사절’로 돌아와 숙부 마르케 왕의 신부로 바로 자신을 청하러 왔다는 것이다. “모롤트가 살아 있었다면 누가 감히 이런 치욕을 가져올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절규한다. “그때 복수의 칼을 휘둘렀어야 했는데 나는 연민으로 무장 해제되었고, 이제는 그의 종처럼 왕의 신부로 팔려간다.” 브랑게네는 눈물로 달랜다. “이제는 모두가 화해를 맹세했고 평화가 찾아왔어요. 트리스탄은 그저 임무를 다한 것뿐이에요. 오히려 그가 당신을 위해 왕의 왕관을 바친 셈이잖아요.” 그녀는 이졸데에게 왕 마르케의 고결함과 인품을 찬양하며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을 왜 불행으로 여기십니까?”라고 부드럽게 설득한다. 하지만 이졸데는 싸늘히 시선을 고정한 채 “사랑하지도 않는 가장 고귀한 남자를 평생 곁에서 보는 일, 그 고통을 어찌 견디랴”라고 중얼거린다. 브랑게네는 달콤한 어조로 “이졸데를 보고 사랑하지 않을 남자는 세상에 없다”며, 트리스탄 또한 예외일리 없다고 속삭인다. 이어 그녀는 은밀히 덧붙인다. “어머니께서 나를 함께 보내신 이유를 잊으셨나요? 그분의 비밀스런 지식은 사랑의 힘을 묶을 수도 있답니다.” 이 말에 이졸데의 눈빛이 번쩍인다. “그래, 어머니의 지혜가 있었지. 그 술법을 이제 쓸 때가 왔다.” 그녀는 “복수를 위한 평안, 배신을 잊을 죽음의 안식”을 구하겠다고 말하며 브랑게네에게 작은 금빛 상자를 가져오라 명한다. 브랑게네가 상자를 열어 보여준다. “여기엔 어머니가 마련한 모든 묘약이 있습니다. 상처엔 향유, 독엔 해독” 그러나 이졸데는 다른 작은 병을 꺼내며 단호히 말한다. “나는 이 약의 표식을 알아두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잔이다. 이것만이 나를 구원할 것이다.” 브랑게네가 경악하며 물러서지만 그 순간 바깥에서 선원들의 구령이 들린다. “Ho! He! Ha! He! - 돛을 거둬라!” 이졸데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바람이 빨라졌다. 이제 육지가 가깝다.”
1막 4장
비극적 결단의 순간으로 긴장과 운명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트리스탄의 시종 쿠르베날이 성급히 들어와 이졸데에게 왕 마르케의 성으로 갈 준비를 서두르라 전한다. 그러나 이졸데는 격노와 절망을 억누르며 품위를 지킨 채 단호하게 거절한다. “속죄 없는 화해는 없다”는 말로 그녀는 트리스탄의 배신에 대한 응보를 요구한다.쿠르베날이 물러나자 이졸데는 브랑게네를 껴안으며 이별을 고한다. “나는 여기 남아 트리스탄을 기다리겠다.” 그녀는 어머니가 남긴 약병을 꺼내 속죄의 음료를 준비하라 명한다. 그 병 속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자 죽음을 부르는 독이 담겨 있다. 브랑게네가 공포에 질려 묻는다. “그 음료를 누구에게?” 이졸데는 냉정하게 답한다. “나를 배신한 자에게, 트리스탄에게.” 그때 쿠르베날이 다시 나타나 “트리스탄 경이 오신다”고 외친다. 이졸데는 결연히 몸을 가다듬고 그를 맞을 준비를 한다. 죽음과 사랑이 한 잔의 음료 속에서 맞닿는 순간, 비극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다.
1막 5장
죽음의 결단이 사랑의 환희로 전복되는 장면이다. 트리스탄이 들어서자 이졸데는 분노와 격정 속에서 그를 맞는다. 그녀는 과거 트리스탄이 자신이 약으로 구해준 병자 ‘탄트리스’였음을 밝히며, 그가 약혼자 모롤트를 죽인 원수임을 상기시킨다. 트리스탄은 속죄를 말하지만 이졸데는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녀는 복수와 속죄의 의례로 ‘화해의 음료’를 함께 마시자 제안한다. 이 음료는 죽음을 부르는 독으로 이졸데는 함께 죽음을 맞겠다는 결심으로 건넨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그것이 이졸데의 마법임을 알고도 받아들인다. “이 한 잔으로 나의 고통이 치유되리라”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잔을 나누어 마신다. 그러나 죽음 대신 찾아온 것은 격렬한 사랑이다. 죽음의 의식이 곧 사랑의 탄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음악과 외침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배는 항구에 도착한다. 밖에서는 “마르케 왕 만세”의 환성이 울리고 브란게네는 공포에 질려 외친다. “그건 죽음의 약이 아니라 사랑의 약이었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서로를 부르며 황홀 속에 빠지고 세상과 현실은 사라진다. 커튼이 열리자 배는 성에 닿고, 왕의 행렬이 다가오지만 두 사람은 오직 서로만을 본다. 비극의 씨앗은 이미 피어났고, 그들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2막 1장
이졸데의 방 앞, 여름밤의 정원.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고 멀리 사냥의 뿔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을 기다리며 마음이 들떠 있지만 브랑게네는 여전히 불안하다. “아직 사냥대가 멀리 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졸데는 그 말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건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의 속삭임일 뿐이야. 그가 오고 있어” 그녀의 귀엔 이제 뿔소리 대신 샘물의 흐름만 들린다. 브랑게네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있어요. 특히 멜로트, 그 사람을 경계하세요. 그는 왕에게 두 사람의 비밀을 알리려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졸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는다. “그가 트리스탄의 가장 충실한 친구예요. 오늘 밤, 이 만남을 도운 사람도 바로 그였어요” 그녀에게 세상의 경고는 더 이상 닿지 않는다. “이제 신호를 보내요. 횃불을 꺼요. 밤이 우리를 부르고 있어요.” 브랑게네는 절규한다. “오늘만은 그 불을 끄지 마세요. 이건 위험이에요” 하지만 이졸데는 이미 사랑에 운명을 맡긴 사람의 눈빛으로 답한다. “사랑의 여신이 내 삶과 죽음을 엮어버렸어요. 그녀가 원한다면 나는 따를 뿐이에요.”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횃불을 뽑아 들어 땅에 내던진다. 빛은 서서히 꺼지고 정원은 어둠에 잠긴다. 브란게네는 두려움 속에 성루로 올라가 밤을 지킨다. 이졸데는 홀로 남아 나무 그늘 아래를 바라보며 점점 커지는 설렘에 몸을 떤다. 그녀는 손수건을 흔들며 신호를 보낸다. 처음엔 망설이던 손짓이 점점 빨라지고, 마침내 환희에 찬 눈빛으로 그를 알아본다. “그가 왔어” 그녀는 계단 끝까지 달려 올라가 팔을 벌리고 사랑하는 이의 품으로 뛰어든다.
2막 2장
어둠 속에서 트리스탄이 달려온다. “이졸데!” - “트리스탄!” 두 사람은 숨이 막히는 포옹 속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정말 당신인가?”, “꿈이 아니겠지?” 그들의 대화는 현실을 잊은 환희로 가득하다. 빛과 어둠, 시간과 거리가 모두 사라진 듯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자신들을 갈라놓았던 낮의 세계를 저주한다. 트리스탄은 “태양은 우리를 속였다”고, 이졸데는 “그 거짓된 빛 때문에 당신을 의심했다”고 고백한다. 그들에게 낮은 위선과 질서, 의무의 상징이며 밤은 사랑의 진실이 깃든 자유의 세계다. “낮의 거짓된 빛을 거두고 밤의 영원한 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노래처럼 섞이고, 현실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트리스탄은 “그대의 손안에 있던 죽음의 잔이 나를 살게 했다”고 말하며 이졸데는 “그 잔은 오히려 우리를 밤의 신비로 이끌었다”고 응답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완성이다. 세상의 영광과 명예, 질투와 빛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영원한 밤, 끝없는 사랑”만이 남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 속삭인다. 그 순간, 멀리서 브랑게네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심하세요, 밤이 곧 물러갑니다.” 그러나 그 경고조차 닿지 않는다. 이졸데는 황홀한 미소로 말한다. “나는 이 밤 속에서 죽고 싶어요” 트리스탄은 답한다. “죽음조차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 속에 외친다.
“오, 영원의 밤이여!
사랑의 죽음이여!
세상의 빛이여, 꺼져라!
이제 우리는 하나로 산다.”
2막 3장
정원의 새벽, 갑자기 브란게네의 비명과 함께 쿠르베날이 검을 빼 들고 달려든다. “트리스탄, 도망치세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마르케 왕과 멜로트, 수행원들이 사냥꾼의 차림으로 들이닥친다. 이졸데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고 트리스탄은 망토로 그녀를 감싸며 침묵 속에 서 있다. 희미한 새벽빛이 두 연인을 비춘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트리스탄이 낮게 말한다. “이 비참한 낮, 마지막이구나” 멜로트는 자신이 왕에게 진실을 밝힌 것이라며 공을 세운 듯 자랑하지만 마르크는 오히려 절망한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트리스탄에게 묻는다. “내 가장 신뢰한 자여, 어찌 나를 이렇게 속였느냐?” 왕은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고 고백한다 - 왕국의 절반, 신뢰, 그리고 결혼조차도 트리스탄의 간청으로 결정했음을. “그토록 내가 사랑한 벗이 내게 이런 상처를 주다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의 말은 분노보다 더 깊은 슬픔으로 울린다. 트리스탄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대답한다. “왕이시여, 당신은 그 이유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졸데를 향해 눈길을 돌린다. “나의 길은 이제 어둠의 나라로 향합니다. 그곳엔 태양의 빛이 닿지 않지요. 어머니가 나를 그곳에서 세상으로 보냈듯, 이제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나와 함께 오겠소, 이졸데?” 이졸데는 고요히 미소 지으며 답한다. “그대가 가는 곳이 나의 나라인데 어찌 따르지 않겠어요? 세상 끝이라도 함께 가겠어요” 트리스탄은 그녀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긴다. 그때 멜로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친다. “배신자! 왕께 이런 모욕을 두고 보실 겁니까?” 그리고 칼을 빼 든다. 트리스탄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본다. “멜로트, 그대는 한때 나의 친구였지. 나의 명예와 왕의 은혜를 위해 애쓴 자였어. 그러나 그대 또한 그녀의 눈빛에 사로잡혔구나” 그러곤 덤벼드는 멜로트의 칼을 맞받아들지만, 이내 스스로의 검을 떨어뜨리고 흉부를 찔린다.
그는 쿠르베날의 품에 쓰러지고 이졸데가 절규하며 그를 껴안는다. 마르케 왕은 충격에 멜로트를 막아 세우지만 이미 늦었다. 무대는 새벽빛 속에서 얼어붙은 듯 멈추고, 두 연인을 감싼 정적 속에 막이 내려간다.
3막 1장
브르타뉴의 성 카레올. 버려진 정원 한가운데 거대한 보리수 그늘 아래 트리스탄이 창백하게 쓰러져 있고 쿠르베날이 숨소리를 세며 지킨다. 바깥에서는 목동의 피리가 애조 띤 선율을 반복한다. 배가 보이면 기쁜 가락으로 바꾸겠다는 약속과 달리 바다는 여전히 비어 있다. 트리스탄이 꿈결처럼 깨어나 “여긴 어디인가” 중얼거린다. 쿠르베날이 “선조의 성, 카레올”이라 달래지만, 트리스탄의 의식은 밤의 세계와 망각 사이를 헤맨다. 그는 낮을 저주하고 이졸데를 부른다. “그녀는 아직 태양 아래 있구나.. 언제 그 빛을 꺼 우리를 밤으로 인도하나” 쿠르베날은 마지막 희망을 건네듯 고백한다. “당신의 상처를 고칠 유일한 의사 - 이졸데를 코른월에서 데려오고 있습니다.” 트리스탄은 벗을 끌어안고 환히 웃다가 곧 사랑의 묘약을 저주한다. “그 잔이 나를 죽음에서 구했으나 영원히 끝나지 않는 갈망 속에 가두었다.” 격정 끝에 그는 실신한다. 잠시 후 다시 깨어난 트리스탄은 배가 오고 있다며 환상을 보듯 재촉한다. 망설이던 쿠르베날이 성루로 달려가 바다를 확인하는 순간 목동의 선율이 기쁜 가락으로 바뀐다. “배다! 북쪽에서 빠르게 온다!” 트리스탄은 상반신을 일으켜 깃발을 묻고 암초 너머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선체에 숨을 죈다. 의심과 안도가 교차하던 찰나 - “이졸데가 손을 흔든다!” 배가 항구에 닿고 이졸데가 곧장 육지로 뛰어내린다. 트리스탄은 쿠르베날을 재촉한다. “해변으로! 그녀를 이리 데려와!” 쿠르베날은 “내 팔에 업어 오겠다”고 답하며 아래로 달려간다. 정원엔 여전히 목동의 밝은 선율이 울리고 트리스탄의 눈엔 오직 한 사람만이 남는다.
3막 2장
트리스탄의 성 카레올. 멀리서 파도와 바람이 섞여 들리는 가운데 트리스탄이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창백한 얼굴, 열에 들뜬 눈. 그는 “이 태양, 이 빛나는 날!”이라 외치며 죽음 직전의 환희에 휩싸인다. 그는 상처를 싸맨 붕대를 찢으며 피를 쏟는다. “과거엔 피 흘리며 모롤트를 쓰러뜨렸고, 오늘은 피 흘리며 이졸데를 되찾는다!” 그는 비틀거리며 무대 중앙으로 향한다. 그때 멀리서 이졸데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린다. “트리스탄! 사랑하는 이여!”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빛을 듣는다! 이제 그 빛이 꺼진다!”라 외치며 그녀에게 달려간다. 두 사람은 무대 중앙에서 마침내 서로의 품에 안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트리스탄은 이졸데의 팔에 안긴 채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는다. “이졸데...” - 숨이 멎는다. 이졸데는 절규하며 그를 끌어안는다. “트리스탄! 나예요, 내가 왔어요. 아직 나를 들을 수 있나요?” 그녀는 피묻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외친다. “그 상처로 죽지 말아요, 내가 고쳐줄게요. 오늘 밤 우리 함께 죽음을 나누어요”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사라지고 심장은 멈췄다. 이졸데는 무너진다. “나를 벌하듯 그렇게 떠나나요? 내 모든 고통이 당신을 향했는데..” 그녀는 마지막 희망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 깨어날지 모른다” 믿으며 속삭인다. “트리스탄..”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다. 결국 그녀는 그의 시신 위에 몸을 던지며 의식을 잃는다.
3막 3장
트리스탄이 죽자 쿠르베날은 말을 잃은 채 그 곁에 무너진다. 정적을 깨고 목동이 뛰어와 속삭인다. “두 번째 배가 옵니다.” 쿠르베날은 성벽 위를 내다보며 절규한다. “저건 마르케 왕의 배다! 무기를 들어라!” 그는 성문을 막으려 하지만 곧 왕과 멜로트, 병사들이 몰려온다. 싸움이 벌어지고 쿠르베날은 분노에 휩싸여 멜로트를 찔러 쓰러뜨린다. “죽어라, 비열한 자!” 그러나 그도 곧 치명상을 입는다. 브랑게네가 도착해 외친다. “멈춰요, 쿠르베날! 오해예요!” 하지만 피비린내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마르케 왕이 뒤따라 들어와 절망스럽게 외친다. “이게 무슨 일이냐! 트리스탄, 내 친구여!” 쿠르베날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트리스탄의 손을 잡고 속삭인다. “나를 꾸짖지 말아요.. 충성은 함께 죽습니다.” - 그는 트리스탄의 발치에서 숨을 거둔다. 마르크 왕은 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친구를 끌어안는다. “트리스탄, 왜 또 날 속였느냐? 오늘은 네 충성을 증명하려 달려왔는데..” 그의 곁에서 브랑게네가 진실을 밝힌다. “폐하, 저는 모든 걸 고했습니다. 사랑의 묘약이 두 분을 엮었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왕께서 화해하려 오신 겁니다.” 마르케는 오열한다. “우리가 평화를 전하려 왔건만 불행이 우리보다 먼저 닿았구나..” 그때 이졸데가 깨어난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보세요.. 그가 웃고 있어요. 눈을 떴어요. 얼마나 빛나는지!” 그녀는 트리스탄의 얼굴 위로 몸을 굽히며 황홀 속으로 빠져든다. “이 향기, 이 바람, 이 노래.. 나를 감싸네. 이제 나도 그에게로”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르케는 무릎을 꿇어 두 연인의 시신을 축복한다. 전장은 침묵에 잠기고 파도와 빛이 마지막처럼 흔들린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되고, 죽음은 사랑으로 정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