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도티 Luca Dotti
요샌 1년이 3~4년 단위로 훌쩍 지나는 것 같다. 이 책 인상 깊게 읽고 소장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이게 몇 년 전이야. 과거에 내가 남긴 문장을 현재의 시선으로 마주하는 건 마치 잘 익은 와인을 개봉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2018. 10. 14.)
영화 「로마의 휴일, 1953」,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1962」등에 출연했던 세기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1929-1993, 브뤼셀)에 대한 회고록을 담은 책. 처음엔 책 표지가 예뻐서 눈길이 갔는데 읽어보니 내용도 참 아름답다. 저자는 오드리 헵번의 아들 루카 도티 Luca Dotti.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대출해서 읽었는데, 소장 가치가 충분하여 이 글을 마무리하고 바로 주문하려고 한다.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평생 리허설을 하다가 마침내 그 배역을 따냈나 보다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마주할 때마다 늘 비슷한 감탄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도 눈부시지만, 노년에 이른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우아함과 기품 때문이다. 흔히 세월은 사람의 성격과 삶의 태도를 얼굴 위에 새긴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젊을 때는 빼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세월이 흐르며 어딘가 날카롭고 거친 인상을 남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그런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세기의 연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겨진 그녀의 일상은 의외로 소박하고 정갈했다. 파스타와 초콜릿을 사랑하고, 직접 요리하며 꼼꼼하게 레시피를 남겨둘 정도였다. 프랑스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 Hubert de Givenchy, 배우 율 브린너 Yul Brynner 등 여러 예술가들과도 따뜻한 우정을 이어갔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고, 정원을 가꾸며 반려견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피핀'이라는 이름의 사슴을 기를 만큼 동물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그녀가 UNICEF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남긴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평생 리허설을 하다가 마침내 그 배역을 따냈나 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흔들리는 사람들, 소박한 기쁨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물론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의 삶과 평범한 개인의 삶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삶에는 분명 배울 점이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나다운 삶이며,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그 본질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값진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