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픔이란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를 추모하며
어설픔을 첫 글로 쓰는 것이 브런치에 첫 글을 발행하는 나의 미숙한 글쓰기에 대한 변명으로 읽히지는 않기를 바란다. 어설픔의 의미에 대해 어제 문득 생각했다.
얼마 전에 보사노바 재즈 싱어 질베르토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근래 가장 좋아하는 재즈 중 한 곡인 Girl from Ipanema의 싱어. 질베르토가 부르는 이 곡은 여름 재즈하면 플레이리스트에 가장 먼저 초대되는 곡이다. 짙게 탄 피부와 큰 키의 여성이 지나갈 때마다 말을 걸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남성을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각에서 느껴지는, 내가 아닌 타인의 두근거림을 엿보는 얕은 설렘과 무심한듯한 안타까움이 가사에도 또 곡에도 잘 녹아들어 있다. 거기에 얕게 흥얼거리듯 말해지는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실제 이파네마가 어디든 우리를 태양빛 내리쬐는 바닷가 앞의 펍으로 이끌며 다 식어버린 병맥주를 앞에 두고 잔잔한 자장가를 들아보지 않겠냐 묻는다.
보사노바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어설픈 질베르토의 영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구독하는 유튜브 재즈 채널에서는 질베르토의 소식을 전하며 그녀를 설명하는 한 특징으로 어설픈 영어를 말했다. 어설픔, 하는 일이 몸에 익지 않아 엉성하고 거친 데가 있다는 것, 그것보다는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새로운 방향을 더하는 힘이 아닐까. 그녀가 발음하는 영어는 그것이 어설퍼서인지 힘이 없고, 그래서 가볍다. 흔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보사노바에 찰떡인 목소리랄까. 가장 첫 소절, 이파네마의 여성을 묘사하는 "tall"이란 단어가 "똘" 또는 "떨"이라 불리는 순간 그녀의 영어는 영어가 아니라 보사노바의 한 구성-멜로디, 화음 같은-으로 녹아들어 버린다.
여름을 즐기며, 그녀를 추모하며, 어설픔의 사랑스러움이라는 뻔한 구절을 생각하며, 장마가 무겁지 않기를 기대하며, 바다를 상상하며,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노래 summer samba를 슬쩍 추천하며 첫 글을 가벼이 마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