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독서에 대하여.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이 한껏 강해지는 방학이 무르익었다.
무르익었다고 표현하기에는 이제 막 시작하지 않았나 싶지만, 무더운 날씨는 방학을 익힌다. 방학을 설익게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습기와 더위 속에서는 방학이 이제 시작했든 한창이든 중요하지 않다. 설익은 방학은 우리를 텅 빈 시간표에 성급히 적응하도록 만들어버리고, 그럴수록 방학을 그저 수업 없는 무명의 붕 뜬 시간으로 만들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3년간 대학 생활을 해오며 나의 방학은 부끄럽게도 그러했으니.
4학년이 되니 마음이 급해졌다. 취업에 대한 걱정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 모두가 알차게 즐기라고 강조하던 그 대학 학부 생활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을 뿐이다. 더 용기를 가져볼걸, 더 도전해 볼걸,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그나마 지금 이 정도의 능력치가 쌓인 상태에서 도전을 했기에 조금 더 일들을 수월히 수행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 때문이다. 미숙하고 어리숙한 지난날의 나도 어떻게든 성과물을 만들어냈겠으나, 그래도 나는 지금의 내가 만들어내는 성과물이 더 마음에 든다.
방학만 되면 솟아오르는,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지지부진하게 말을 늘어놓게 되더라도 이 설명을 이어나가고 싶다 느끼는 것은 왜일까. 오늘 한 독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읽었던 책이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은 부끄럽게도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다. 부끄럽지 않기 위함이라는 이유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모순인가? 독서와 사고보다 학교와 학원의 교육과 시험에 먼저 익숙해진 나에게 독서는 생활기록부를 채우는 용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왔다. 지금 되돌아보면 너무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엄마를 탓하기도 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봄에서 나 외의 그 누구도 탓할 사람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 좋아하는 책 취향 하나도 선명하지 않은 나를 부끄러워한다. 책을 읽는 것의 재미를 느껴보지 않은 나를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싶다. 매 방학 나에게는 책 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넘쳐났지만, 이번 방학은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안다. 안다고 다짐한다. 4학년이 되어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아니면 나는 언제 먹고 싶은 책을 다 먹어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책 읽다가 재미 없어지면 저 책 읽는, 누군가는 의미 없다고 비판할지도 모르는 그 작업을 이번에는 해볼 것이다. 안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글에 물음표가 많아지는 것은 결국 동의를 구하기 위함임을 안다. 민망함 때문임을 역시 안다. 신사역 알라딘 중고 서점 매장에 들어가서 좁디좁은 예술 코너 앞에서만 서성거렸던 나를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도 한없이 부끄럽기 때문임을 안다.
그래서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네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선물해 줘, 하는 것은 당황스러운 질문인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선물이라도 받아야 고마운 마음이 나를 그 책 앞으로 더 끌어당길 것임을 안다.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가는 나의 글을 여전히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낙성대 책방에서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를 사고 <해러웨이 선언문>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연구, 전시 관련 문헌을 주욱 살폈다. 독서라고 치기에는 자료 스캐닝에 불과한 행위.
이 글을 쓰게 된 질문으로 돌아온다. 어디에서 책을 읽는가?
오늘 나는 네 시간 동안 국립현대미술관 출판 문헌 속에서 '다양성'이라는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서가 책장 사이의 좁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껏 목을 꺾어내리고 글자를 봤다. 차마 책을 봤다고 말하기에는, 나에게도 저자에게도 무례한 것 같아 글자를 봤다고 말한다. 그저 훑어보고 넘기고 필요할 것 같은 부분을 사진 찍는 행위에 그쳤던 오늘 나의 네 시간은 연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음에도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아직 마음 깊이 담아내지 못했으니, 아직은 글자를 봤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돌아와, 그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면 글자든 책이든 참 잘 읽힌다. 그리고 지하철에 서 있으면 또 책이 그렇게 잘 읽힌다. 어디에서 책을 읽어야 할까? 내 독서 시간은 어디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가? 어디에서 책을 읽는지 생각하는 게 중요할까? 당신은 어디에서 책을 읽는가? 드라마에 나오는, 볕 좋은 곳에서 좋은 노래 들으며 읽는 책은 자장가에 가깝지 않나? 마치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나는 책상 밑 그늘에 쭈그려 앉아 책을 읽어야 하려나.
이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는 기저에는 결국 내가 독서의 스타트를 어떻게든 끊어냈음을 말하려는 마음이 있다. 이것은 나의 부끄러운 '취향 없음' 상태에 대한 변명이자, 나의 달라짐에 대한 다짐이자, 오늘의 나를 공유함이다. 익명(匿名)은 이름을 숨기는 것이지만 익명(翼名)은 내 또 다른 이름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임을 항상 생각해 왔다. 구차한 뜻풀이 뒤에 숨어 나의 부족함을 털어놓고자 함이며, 그럼에도 나의 부족함에 날개를 달아주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