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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보여준 죽음

<할머니가 남긴 선물>

by 민혜숙

나 : (캘리그라피 엽서를 보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쓰시고 한 줄 더 덧붙이셨네요.

회원님 : 네 ‘그 또한 다가오리라’라는 거죠

나 : ‘그 또한’이라고 하셨는데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 건가요?

회원님 : 그건 죽는다는 거죠.


‘그 또한 다가오리라’는 말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 압도되지 말고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날들을 선물로 여기며 잘 살라는 부탁처럼 들렸다. 이것을 쓴 캘리그라피 회원님은 나의 오랜 친구다.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분이지만 나는 늘 친구로 여긴다. 10년 넘게 캘리그라피로 이런저런 일을 함께 해왔다. 지금은 내가 운영하는 동아리에 창단 멤버로서 열심히 참여해 주는 고마운 캘리 친구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와 아름다운 시를 발굴하는 능력으로 동아리에서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는 실력파다.


캘리그라피가 아니라면 나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남성과 친구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나의 친구는 요즘 몸과 마음이 약해진 것 같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흔히 우리가 힘겨운 일을 버틸 때 외우는 주문 같은 글 옆에 ‘그 또한 다가오리라’라고 쓴 것을 보면 그렇다. 그 엽서를 내게 달라고 해서 책장 위에 모셔 놓았다. ‘그 또한 다가오리라’.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와 동의어다. 지혜의 말이다. 내 나이도 이제 50대 후반이니 이 경구는 이미 나의 친숙한 선생님이다.


2013년에 캘리그라피를 배울 땐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동아리 리더와 강사로 일하고, 전시회도 열고 선물도 제작하니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글씨를 그리는 이 작업’은 단지 취미 활동이 아니라 느슨하지만 진실한 인간관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친분과 우정을 나누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글씨를 그리다 보면 결국 내 마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생각이 손끝을 통해 나오고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닿는다. 그래서 상대의 속 깊은 마음도 읽게 된다. 회원들이 쓴 글들을 보면 그들의 욕구, 희망, 기대, 성찰 등을 보게 된다.


하늘나라 가신 어머니 기일이 돌아와서 그런지 죽음에 대한 상념이 무의식에 가득했는지 죽음을 다룬 그림책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해서 그림책 모임에서 함께 읽었다. 호주의 작가인 존 브룩스가 그리고 마거린 와일드가 쓴 <할머니가 남긴 선물>이라는 책이다. 나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유신론자이고, 삶도 죽음이 있어서 더 귀해지는 진리를 믿고 있다. 그 죽음에 대한 진리를 그림책은 할머니 돼지와 손녀 돼지의 이야기로 잔잔히 풀어나갔다. 그램책 모임을 할 때 내가 책을 정하는 기준은 마지막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얼마나 감동적이냐인데 이 책 역시 그런 기준으로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책의 원제는 올드 피그 Old Pig 이다. 관사도 없는 이 무심한 제목을 <할머니가 준 선물>로 최순희 작가는 아름답게 번역했다. 할머니 돼지는 어느 날 몸이 아파서 자리에 눕는다. 할머니는 기운이 없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손녀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책을 반납하고 외상값을 갚고 은행에서 돈을 전부 찾아서 손녀에게 준다. 그리고는 마을을 천천히 걸으면서 나뭇잎, 햇살, 구름, 하늘을 바라보고 연못으로 가서 정자가 물에 비친 모습을 본다. 새들의 재재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비도 맞으며 걸어본다.


그렇게 할머니는 세상에 아름다움을 손녀에게 보여주고는 자리에 누웠다. 손녀는 침대에 누운 할머니를 꼭 안아주면서 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그리고 할머니와 걸었던 연못의 정자 앞에 오리와 함께 서서 손녀 돼지가 새들을 바라보는 마지막 페이지는 이별의 슬픔으로 나를 울게 했지만, 손녀 돼지는 정작 울고 있지 않았다.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은 자로서 사랑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살아갈 것 같은 마무리였다.


이 그림책에서 내 마음을 끈 것은 할머니의 죽음을 끝까지 곁에서 지켜주는 손녀였다. 할머니는 손녀의 첼로 연주와 창문으로 들어오는 산들바람과 달빛과 함께하고 있었다. 홀로가 아닌 사랑하는 이와 함께, 게다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함께 하는 죽음은 삶이 종결되는 슬픔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완성되는 그런 죽음으로 보였다. 그래서 손녀는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비통해하지 않고, 할머니와 이별 후에도 물가에 서서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엄마가 아프신 동안 보살펴 드리는 시간을 보냈고 마지막 순간에 엄마 손을 잡고 마지막 숨을 쉬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또한 다가오는 것은 죽음뿐 아니라 AI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이 중심이 되었던 가치 기준이 효율, 속도, 성장으로 대체될까 막연한 두려움이 머리 속을 뱅뱅 돈다. 어쩌면 우리가 여태껏 소중히 여겼던 신과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들마저 잃을까 걱정이 된다.


지난달에 우리 마을 음악회에서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아이들 일곱 명이 동요를 무대에서 귀엽게 불러 주었다. 내 친구가 동요지도를 맡아 주말마다 우리 집에서 피아노 반주로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이 연습하는 동안 나도 그 노래를 다 외웠다. 가사가 너무 좋아서 온종일 되뇌기도 했다. 우리들의 죽음은 가사처럼 옆에서 속삭여 주는 사랑하는 이들이 있을 때, 아프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생의 완성으로 사랑의 성취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프고 두려울 때 우는 우리는 AI가 아니라, 호~ 불어 줄 그 누군가를 늘 원한다. 그 동요는 김진영 교수가 작사 작곡한 ‘내가 호~ 불어 줄게요’이다.

어디가 아프세요? 많이 아프신가요?

너무 아파서 울었나요? 마음도 상했나요?

내가 호~ 불어 줄게요. 천사도 함께하지요.

기쁨을 여기 놓고 갈게요. 이제 웃을 일만 남았죠.

때로는 두렵나요? 많이 걱정되나요?

너무 두려워 울었나요? 마음도 상했나요?

내가 호~ 불어 줄게요. 천사도 함께하지요.

기쁨을 여기 놓고 갈게요. 이제 웃을 일만 남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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