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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Dec 01. 2023

첼로 100일

첼로와 공부는 같다


나: 어 벌써 7시 10분이네. 오늘 미선이는 안 오니?

서진 : 아 미선이가 오늘 저한테 와서 모든 과외 다 끊어버린다고 했어요.

나 : 아니 왜? 갑자기?

서진 : 대학을 안 간대요.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미선이는 과외 과다 증후군에 시달리는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거의 잠을 자고, 과외 숙제한다고 밤에 안자는 학생. 그리고 이 지방 촌구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추었다. 이런 미선이가 중3 막바지까지 버텨 준 것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제1 악조건은 미선이와 서진이의 만남. 두 가정은 사업상 파트너이고 두 아이의 부모님들은 매우 친한 사이다. 어머니들끼리는 모임을 만들어 같이 여행도 다니고 저녁에 술자리도 같이하는 좋은 이웃으로 지낸다.


좋은 이웃으로 지내면서 자녀에게 여러 과목의 과외를 같이 시켰을 때 두 아이의 성적 차이가 나면 곤란해지기 시작한다. 성적 차이가 심히 나면 학생을 분리해야 하는데 그게 절대 안 된다. 서로 조심스러워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선생님인 나도 말하기 차마 곤란하다. 부모와 아이가 만든 이 인간관계에 상처를 낼까 봐 선생인 나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따로 일대일 수업을 하면 교육비도 올라가고 나의 수업시간도 늘어나고 시간표 다시 짜야 하고, 내 선에서도 엄청 골치 아파진다. 그래서 이건 아닌데 하면서 1년 정도 시간을 보냈다. 합리적인 생각을 바로 말하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이 시골 정서인지 동양 정서인지... 이 사태에 나의 이기심도 들어 있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서진이와 미선이는 기저귀 친구다. 기저귀 찰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만나는 친구다. 서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국어 영어 수학 과학 과외를 같이 해서 그다. 두 아이들은 중학교 1학년 3월터 중3 기말고사를 보면서 지금까지 나와 공부했다. 서진이는 정확하고 책임감 강한 칼 같은 성격이라 공부에 매우 능하다. 전교권에서 노는 학생이다. 반대로 미선이는 꿈꾸는 몽상가에 인스타 친구가 너무나 많고 글쓰기와 노래와 춤추기에 매우 능하다. 중1 때까지 민요를 배우면서 국악을 전공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을 만큼 노래를 잘한다. 또 자신이 쓰고 있는 인터넷 소설에 제법 구독자도 있을 만큼 글을 쓰는 능력이 있다. 미선이가 가끔 시를 써서 부끄럽다면서 보여주기도 했는데 내용을 떠나 시를 쓴다는 그 자체에 나는 감동 받았다. 시를 읽는 사람도 없는데 시를 쓰다니! 외로움이 배어 나오는 시였다. 마음이 짠했다. 음악과 문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에게 아버지는 의사가 되라고 하고, 어머니는 이과로 가라고 하신다. 그래서 과학과 수학 과외가 산더미 같은 상황. 자신의 재능과 전혀 상관없는 부모님의 진로 강요는 미선이의 악조건 두 번째 사항.     


첼로를 배우면서 미선이 생각을 했다. 나도 미선이처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즐겁게 레슨을 시작한 것이 8월 중순의 더운 여름날이었다. 스즈키 교본 1권을 환희의 눈으로 바라보며 진도를 나갈 때는 어렵지만 신이 나 있었다. 그러다가 15번째 곡 <즐거운 농부>에서 좌절감을 맛보았다. 레슨비가 만만치 않은데 진도를 하나도 못 나가고 3주째 지난 시간에 들었던 주의사항을 다시 들었을 때 마음이 쓰렸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쓴 에릭 시블린 작가도 우연히 유명한 첼리스트를 카페에서 만나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다. 나도 우연히 나의 학생이 자기 사촌 언니에게 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다가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시작은 이렇게 낭만적으로 어쩌다 우연히 이루어진다. 그런데 낭만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에릭 시블린 작가도 첼로를 배우다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는 마음에 첼로 레슨을 그만둔다. 그리고 자신이 매우 잘하는 기타로 바흐 무반주 연주곡을 편곡해서 연주하지만, 첼로의 폭풍 같은 압도적인 소리를 낼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에릭 시블린 작가처럼 나도 첼로를 그만두고 첼로를 거실을 장식품으로 써야 하나 고민의 시간이 잠시 왔다.      


<즐거운 농부>라는 교본의 15번째 곡은 참 아름다운 곡이지만 연주하기 잘 연주하기 힘들었다. 스타카토도 아니고 레가토도 아닌 메조 스타카토라는 연주법을 익혀야 했고 빠른 연주를 해야 했다. 농사일은 정말 어려운데 즐거운 농부라니, 이건 작곡가의 상상력에나 존재하는 거라고 투덜거렸다. 즐거운 농부가 아니라 괴로운 농부가 되고 있는데, 나의 선생님은 <에델바이스>를 곁들여 연주하라고 숙제를 내주셨다. 설상가상. 내가 사랑하는 <에델바이스> 곡을 내가 연주하니 아름다움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 도에서 솔로 내려오는 부분에서 음을 왼손 손가락이 민첩하게 움직여야하는데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끊어 연주하는 것으로 선생님이 양보해 주셨다. 2박자 3박자의 유장한 음을 내야 하는데 오히려 느린 곡이 표현하기가 더 어려웠다. 차라리 <즐거운 농부>가 <에델바이스>보다 수월했다.      


혹시 나도 첼로를 포기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14번째 레슨을 갔다.  선생님이 <즐거운 농부> 피아노 반주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켜 주시면서 피아노와 같이 연주해 보라 하셨다. 머리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냥 연주하기도 버거운데 반주에 맞추려니 뇌에 일을 하나 더 시켜야 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희열은 무엇인가? 더 버벅거렸는데도 선생님이 누구나 그런 거라면서 괜찮다고 하시는데 그 말을 굳게 믿으며 집을 돌아와 그 피아노 반주를 다시 들어 보았다. 피아노 소리는 나의 첼로 소리에 답해주는 엄마의 음성 같았다. ‘그래 그래 괜찮아. 음 멋지게 들려.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1분이 조금 넘는 <즐거운 농부> 연주를 3회 연속하게 하도록 반주는 만들어져 있었다. 피아노 소리에 위로 받으며 발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춰가며 한 100번은 연습한 거 같다. 그랬더니 잘 안 되던 <에델바이스>도 나아졌다. 필 받은 김에 찬송가 <How Great Thou Art>도 엉터리지만 연주를 해봤다. 쉬운 음계라 연주하면서 첼로의 압도하는 폭풍 같은 소리와 진동에 잠시 도취가 되었다. 드디어 <즐거운 농부>가 끝나고, 교본 1의 마지막 곡 바흐의 <미뉴엣>으로 넘어갔다. 바흐 선생님을 다시 만나니 또 힘이 났다.     


미선이가 무단결석을 한 지난 목요일에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못 받았으니 다시 연락을 주신다고 카톡을 남기고는 연락이 없었다. 주말이 지나고 화요일에도 무단결석을 하면 나는 미선이를 그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화요일 저녁 7시에 미선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에 나왔다. 그리고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화내지 않고 그냥 웃으며 엄마와의 일어난 말다툼과 이어지는 부조리한 모든 사태에 대해 들어주었다. 내가 그냥 영어 선생님이 아니라 멘토가 되어 줄테니 다시 공부해 보자고 다독여 주었다. <즐거운 농부>에서 좌절하려 할 때 문득 나타난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나에게 건넨 위로처럼 나도 미선이에게 피아노 소리가 되어 주고 싶었고 그런 책임감도 느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막무가내의 부모를 떠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울로 대학을 가는 거라고. 좋은 대학을 가는 것으로 부모에게 복수하라고 해주었다.      


미선이를 통해 나는 많은 공부를 한다. 청소년 부모님들은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 부모는 아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좋은 부모가 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사교육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학습 동기 부여는 돈으로 살 수 없다. 동기 부여는 경청과 위로에서 나온다.      


내가 첼로를 시작하게 했던 학생에게  <즐거운 농부>를 4주째 하고 있다고 하니 ‘선생님! 저는 두 달 걸렸어요!’라고 한다. 작은 위로가 되었다. 우리가 ‘작은 일에 위로받는 것은 작은 일에 상처받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주는 작은 위로로 아이들이 입시 지옥에서 버티기 바란다. 나도 선생님과 가족이 주는 작은 위로를 받아가며 나의 ‘반려 악기’ 첼로를 배워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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