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 저의 아이는 이해력은 좋은데 암기가 문제에요.
나 : 어떤 암기가 안 되나요?
어머니 : 문법은 잘 이해하는데 영어단어 암기하기를 싫어해요.
나 : 그럼 문법도 잘 된다고 할 수 없을 거 같은데요.
영어단어 암기는 영어 공부의 첫 걸림돌이다. 언어를 배울 때 단어는 총알이고 문법은 총에 해당한다. 총이 아무리 좋아도 총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서점에 가보면 영어 암기를 잘하도록 만들어진 수많은 단어장이 있다. 단어를 문장 속에서 파악하도록 문제를 풀게 되어 있고, 주제별로 단어를 분리해 놓은 단어장도 있다. 어원 설명을 바탕으로 어휘를 늘려가는 책도 있고 이야기를 지문으로 써놓고 맥락을 통해 단어 암기를 해 놓은 책도 있고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이런 좋은 교재로 나랑 같이 수업시간마다 단어 채점을 하는데도 단어를 정말 못 외우는 학생들이 있다. 결국, 그런 학생들과는 나는 수업을 이어가지 못한다. 수업종료의 가장 큰 이유가 단어 암기가 잘 안 돼서라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다.
보통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가 이해력은 좋은데 단순한 암기를 싫어해서 영어에 흥미를 잃고 성적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시는데 그건 정말 오해다. 영어 문법은 이해하는 것이고, 단어는 단순히 암기하는 거니까 머리는 좋은데 인내심이 부족한 정도의 상태로 인지하시는데 그건 잘못된 판단이다. 왜냐하면, 단어 암기도 이해가 필요하고 문법도 개념을 암기해야 하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단어를 암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기와 이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다. 문법을 수업시간에 이해했는데 복습을 안 해서 이해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단어의 발음부터 파악한다. 발음을 모르면 단어를 알아도 듣기시험에서 틀리기 때문이다. ‘웃다 laugh’를 ‘레프’ 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하면 아이들은 웃을 수가 없고 짜증을 낸다. 뭐 이따구가 있나요?라는 표정을 짓는다. 묵음도 많고 발음 규칙의 예외도 많은 영어는 외우기 힘든 면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단어를 외우려고 자기 맘대로 찬란한 발음을 만들어내는 아이들이 있다. disabled ‘디스에이블드’를 ‘디사블레드’로 발음하는 귀여운 남학생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이쯤 되면 접두사 접미사를 설명해 준다. 영어는 정말 모음이 힘들다. 영어는 ‘진심으로 이상한 언어다’라고 하며 공감도 해 주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발음기호를 잘 몰라서 나는 그냥 우리말로 예상 밖의 발음이 나는 단어만 적어 놓으라고 한다. 또 파생어도 중요하다. 주로 동사 하나에서 파생되는 명사 형용사 또 그것의 반대말들을 한꺼번에 가르쳐준다. 단어 하나 알면 줄줄이 더 많은 단어를 알게 되는 ‘개이득’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라고. 단어를 무작정 암기하기보다는 파생어, 접두사, 접미사, 어원을 이해하면서 외우면 훨씬 도움이 된다.
발음을 파악했으면 이제 암기를 해야 하는데 장기기억이 되도록 암기하는 것이 관건이다. 선생님이 내준 좁은 범위의 숙제를 외워서 단어시험을 보는 것을 작업기억이라고 한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단어를 만나도 아는 것을 장기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 기억소에 단어가 충분하지 못하면 당장 고등학교 내신 시험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중학교 때 시험에는 교과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의 단어로 문제가 출제되지만, 고등학교 시험에는 단어와 문법의 시험 범위가 사실상 없다. 수능 모의고사 역시 영어는 특정한 시험 범위가 없다. 장기기억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chat GPT에 물어봤더니 집중, 반복, 관련 정보 연결, 메모 같은 기술이 나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말하라면 나는 집중을 꼽고 싶다.
집중은 21세기에 가장 외로운 단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니콜라스 카의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글의 등장과 우리의 뇌의 변화에 관해 설명해 준다. 독서와 인터넷상의 글을 읽을 때 우리 뇌는 매우 다른 활동을 한다. 깊이 있게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읽는 선형적 독서 때문에 풍요로운 정신적 연계능력이 생긴다고 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과 나 자신을 비교한다든지 주인공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를 소설 구조 속에서 파악하는 등의 정신 활동을 한다. 이런 정신 활동은 관련 정보를 연결해 주고 그 연결은 장기기억을 돕는다. 장기기억이 축적되면 스키마 schema가 생겨나고 드디어 나만의 지식 체계가 완성된다. 이런 지식의 연결 능력을 동원해 영어를 공부할 때 문법의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고 필수 단어의 집이 다 지어진다. 단순 암기만 하는 작업기억으로는 불가능하다. 스키마로서 문법과 단어가 완성되면 영어 읽기는 즐거움이 된다. 공부가 즐거워지는 신기한 순간이다.
그런데 극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학생은 교과서와 문제집의 텍스트와 인터넷 검색에 의한 글만 읽는다. 선형적 독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한 독서만 한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때는 질문에 답이 되는 부분만 빠른 속도로 찾아 읽기 때문에 뇌는 매우 피곤해진다고 한다. 피곤해진 뇌는 집중력을 잃고 산만해진다. 웹 텍스트에 제시된 링크를 열어 새로운 글을 계속해서 읽으면 더욱 뇌는 산만해진다. 결국, 다 읽어도 읽은 내용이 정리되지 않고 단편적인 지식을 얻는데 머물게 된다.
단어를 외울 때도 선형적 독서법이 중요하다. 빨리 다 외우려고 하지 말고 그 단어를 둘러싼 다른 단어들과의 연결과 연상 작용을 하면 훨씬 더 장기기억으로 옮기기 쉬워진다. 비슷한 철자,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연결하거나 단어가 주는 이미지를 단어의 뜻과 연관시키는 방법 등으로 풍요롭게 연결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단어를 외우려는 경제원칙이 아니라 최대한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여유로운 정신의 유희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읽은 동화책이나 청소년기의 독서가 영어단어 암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내 학생 중에 특별히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은 모두 풍부한 독서를 한 학생들이다. 고등학생 중에 성적이 좋은 학생들과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 본문 몇몇 페이지를 가지고 이번 겨울 방학 중 수업을 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어 봤냐고 물어봤더니 4명의 학생 모두 번역서는 읽어 봤다고 한다. 요즘은 독서 활동이 학생부에 기재되지 않아서 학교에서 독서 이력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데도 책을 읽는 학생들이 있어서 영어 과외선생으로 사는 재미가 있다.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게 목표도 아니고 서울대나 의대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배우는 게 공부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능력 중 하나가 집중과 몰입의 독서 능력이 아닐까 싶다. AI가 세상을 어찌 변화시킬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선형적 독서로 배운 지식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고 그 지식을 적용하고 활용하면서 자신의 지식의 집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다. IMF 경제 위기 이전에 직업을 구하고 AI가 상용화되기 이전에 은퇴하는 60년대 생인 나는 행운아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어릴 때 배울 기회가 있었고 독서를 지금도 즐길 수 있다니 말이다. 곧 멸종될지도 모르는 독서의 즐거움을 설교하면서 영어를 잘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나의 찐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