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반수 공부 잘되어가고 있니?
은비 : 입학하고 나니까 게을러져서 공부 못하고 있어요.
나 : 그럼 전공 공부는 마음에 들어?
은비 : 네! 교수님들도 너무 좋고 전공 공부도 재미있어요.
은비는 올해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이다. 은비의 별명은 ‘처치 베이비’. 은비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떠나갔고 대한 성공회 교회 사제로 일하시다가 은퇴하신 한 신부님에 의해 입양되어 자랐다. 신부님이 교회에서 일하시면서 은비를 돌보고 계셨는데 아기 때부터 순하고 사람을 잘 따라서 교인들이 서로 돌보아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귀여움을 받고 자란 처치 베이비는 이제 스무 살 예쁜 아가씨가 되었다. 은비는 어려서부터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는데 작년 수능을 잘 못 봐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올 3월 나와 통화할 때는 반수를 해서 다른 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는데, 5월이 되어 신부님을 찾아뵙던 날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니 대학을 바꾸느라 1년 보내기보다는 좋아하는 사회복지 공부를 어서 해서 복지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대학 서열의식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은비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내가 과외수업을 하면서 만난 아이들 대부분은 무엇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는다. 막연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은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업시간 중간에 5분 정도 쉴 때도 아이들은 서로 이야기하기보다는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은 손에 쥔 이 작은 기계로 다 채워진 것 같다. 24시간 타인이 만든 동영상과 SNS를 보고 있고, 나 자신의 모습조차 사진으로 찍힌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내면과 만날 시간이 전혀 없어 보인다. 자신과 대화할 시간이 없으니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할 기회가 없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은비는 자신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것 같다. 은비가 생각한 사회복지사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입양 부모님과 교회의 많은 주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을 나눠주는 직업을 선택하고 싶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사랑하고 나눠주는. Loving and Giving. 이 간단한 단어가 사람을 수식할 때 얼마나 멋진 칭찬이 되는지 유튜브에서 유명한 영상에서 배웠다. ‘아버지가 딸 시집갈 때 하는 멋진 말’이라는 영상에서 신부의 아버지는 사위에게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나눠주는 loving and giving’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 수식어는 은비를 입양하셔서 성인으로 키우신 신부님과 사모님에게 딱 맞는 말이다.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신부님댁에 가서 처음 신부님을 뵈었다. 댁에는 은비 말고도 2명의 어린이가 있었는데, 한 명은 네팔 아버지와 한국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고 또 한 명은 이제 세 돌이 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염둥이 꼬맹이였다. 주름진 얼굴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인데 아이들은 아빠 엄마하고 부르고 있었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노년이시지만 사제직에서 은퇴하시고 고향에 내려와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고 계시는 신부님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신부님은 공적인 일에서는 은퇴하셨지만, 텃밭과 정원을 가꾸고 입양한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시고 가르치고 계신다. 또 박사학위로 받으실 때 연구하신 다석 유영모 선생에 관한 책도 출간하셨고, 공부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또 지역 도서관에서 강의도 하신다. 공적인 사제직에서 은퇴 후 사적인 삶으로 돌아와 의미 있고 즐거운 삶을 가꾸고 계셨다. 지적인 일과 몸으로 사는 일이 조화를 이루어 스캇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과 비슷해 보였다. 많이 아파 누우시기 전까지는 계속 저런 모습으로 일하고 공부하실 것 같다. 사랑하고 나눠주시는 loving and giving 신부님을 좀 닮으면 내 인생이 늙고 닳아도 재미있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고 사는 게 죽을 때까지 허무하지 않을까? 자꾸 나에게 묻게 된다.
90세 100세를 사는 세상이지만 실제로 2019년 기준 한국인의 건강 수명은 73.1세라고 한다. 요즘 노인의학으로 유명해진 정희원 의사 선생님의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에 나온 말이다. 노인 지수라는 노화측정 기준이 있는데 신체와 정서의 건강과 인지기능을 종합한 100가지 질문 중에 10가지에 대해 부정적인 답이 나오면 0.1이라고 했을 경우, 0.25에 해당하면 독립된 삶이 불가능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고 한다. 노쇠지수 0.25에 다다르는 나이가 최근 미국 스탠퍼드 대학 연구에 의하면 78세. 우리나라 기준으로 팔순이 되면 두 사람에 한 사람을 홀로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이 기준으로 보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22년 정도이다.
지금 다니고 있는 성공회 교회 옆에 오랫동안 문을 닫아 쓸모없는 공간이었던 유치원이 다시 리모델링 되어서 지역주민이라면 누구나 와서 음식 만들어 서로 나누고 차를 마시거나 교육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군청의 지원을 받아 도시 재생 사업으로 이루어진 일인데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은비를 키우신 신부님처럼 자녀를 입양해 양육하는 일까지는 못해도 배움에서 소외된 친구들을 돕고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외국인이나 새터민들을 돕는 일하는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완전한 은퇴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배우고 우정을 맺는 일을 멈추지 않으며 노쇠지수가 0.25가 될 때까지 건전지가 완전히 방전되듯 내가 가진 것을 다 써볼 생각이다.
에너지를 완전히 다 쓰는 것은 동네 공설 운동장에서 늘 경험 할 수 있다. 400m 달리기 트랙에는 곡선과 직선이 있다. 곡선을 지나 직선의 트랙에 들어서면 100m의 트랙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 고등학교 때 100m 달리기를 출발하려고 긴장하던 그 기분이 떠오른다. 한달음에 트랙의 저 끝까지 달리고 싶어진다. 이렇게 연습을 해서 지난주에는 옆 동네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4월 우리 동네 마라톤 대회에서 10km를 1시간 8분에 뛰었는데, 지난주의 기록은 1시간 4분. 무려 4분을 단축했다. 10km를 달리면서 내 몸의 에너지를 완전히 쓰고 나면 희열과 성취감을 느낀다. 몇 살까지 10km를 달릴지는 모르겠으나 바람을 맞으며 오르막 내리막길을 달리면 내가 온전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기분이 나를 계속 달리게 하는 것 같다.
이번 대회에서는 남편이 페이스메이커로 뛰어 주지 않고 혼자 뛰어보라고 했다. 달리기용 시계를 차고 속도를 조절하면서 혼자서 10km를 달리면서 생각했다. 달리기에 힘을 모두 쓰는 것처럼 나머지 ‘내 인생을 사랑하고 나눠주는 loving and giving에 힘을 쓰자!’라고 결심했다. 내가 달리는 이유는 노쇠지수가 0.25에 도달하는 시점을 조금씩 늦춰보려는 것. 여러 가지 질병을 관리해야 하는 노인의 몸을 가졌어도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한, 매일매일 에너지를 다 쓰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내 노년의 목표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노을과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논다’라고 했는데, 나는 하늘로 돌아가기 전까지 사람들과 함께 놀고 싶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