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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bubam Aug 04. 2024

휴직일기 002

그렇게 내일을 보내면 좋겠다.

최근에 찍었던 필름들을 옥상필름에 현상신청하고, 잘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고 왔다.


대부분 회사 동료들을 찍은 필름인데, 자그만 올림푸스 RF 카메라를 이베이에서 구하고

늘 가방에 넣고 다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찰칵찰칵 찍었다.

1979년에 발매된 올림푸스 XA


이건 동료들을 찍었던 첫 롤인데 사진 받아보고 슬랙 프로필로도 써주고, 반응이 좋았어서 더 많이 찍게 됐다.


동료들을 찍었던 첫 롤.


제일 기대되는 필름은 최근 워크숍 때 찍었던 사진들인데, 너무 신나서 파샷파샷 찍다 보니 과연 초점이 맞은 사진이 얼마나 나올지 두근두근하다.


신기하게도 휴직 전 마지막 출근 전날 필름 카운터가 망가져서 당분간은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서 마지막 사진들이 더 기대되기도 한다. 


업무용 노트북은 다 반납했지만, 슬랙에는 아직 권한이 남아있는지 채팅이 가능해서 

휴직 첫날 계곡 갔었던 사진도 올리고, '휴직일기 001'도 팀이랑 매일 루틴을 공유했던 루틴채널에 올렸다.


원래도 슬랙을 많이 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노트북이 없어서 업무환경에 들어가지 못하는데도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슬랙을 열어 본 적이 꽤 있었다.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이제는 3인칭 시점에서 회사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데 끊임없이 올라오는 메시지를 보면서 매일 많은 일이 있고, 다들 바쁘게 살고 있구나 한번 더 느낀다. 나는 그곳에서 한발 떨어져 있구나도 한 번씩 더 느끼고...


휴직 전 구입했던 맥북에는 슬랙을 열어두지 않았는데, 이게 참 신기하게도 슬랙을 열어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인 기분이 든다. 


아직 아내도 나도, 휴직보다는 잠깐 주말 껴서 휴가 쓴 것 같아 '길게 쉰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데 한 두 주 지나 봐야 더 몸에 익지 않을까 싶다.



아내는 웬만한 TV 광고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데, 드라마나 영화에 맛있어 보이는 요리가 나오면 며칠 지나 꼭 그 요리를 주문하거나 만들어 먹는다. 군것질 말고 식탐이 없는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이번에 꽂힌 요리는, '언니네 산지직송'에 나왔던 식혜랑, 순두부찌개였다.

그래서 '언니네 산지직송'을 봤던 다음날 우리의 메뉴는...


구운 계란과 식혜의 조합 + Airbnb예약으로 설레는 마음
해물 순두부찌개랑 감자전, 공심채, 콩자반, 어묵


이번에 쉬는 동안, 여행도 많이 가자고 해서 달력에 여행 계획이 하나씩 채워지고 있다.

9월에는 교토에 2주 좀 넘게 다녀올 예정이고, 오늘은 홍천 숲 속에 위치한 Airbnb 숙소를 하나 3박 예약했다. 다른 여행지 후보는 서촌이 있고, 10월에는 아마 동해로 시작해서 남해를 쭉 훑고 올 예정이다.


얼마 전에 발견해서 몇 번이고 결제창까지 갔다가 그만뒀던 원더월 'Film&Photo' 코스를 등록했다.

1년 동안 사진/영상 관련된 원더월 강의를 무제한 들을 수 있는 코스인데 평소에 관심 있어서 구독하던 JDZ (@jdzcity) 작가님 강의를 듣고 싶었던 마음이 크다.


필름, 디지털, 스튜디오 촬영부터 라이트룸 후작업까지 업계 프로들이 강의해 주는 내용들이라 강의 시간이 엄청 길진 않지만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아서 재미있고, 강의 때깔? 도 좋아서 틈날 때마다 보고 있다. (광고 아님...)


원더월 할인해서 다행히 조금(?) 저렴하게 등록 완!


주변에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2009년에 패션사진을 배우러 일본에 유학을 갔었다.

2011년 지진 후에, 학교를 마치지 못한 상태로 돌아와야 했지만...


내가 다녔던 TVA (Tokyo Visual Arts)는 사진 분과 2학년부터 전공이 나뉘는데 세부 전공으로 다큐, 포트레이트, 커머셜, 스포츠, 패션 등이 있다.


나는 당연히(?) 패션을 선택했었다.

남대문,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셨던 엄마, 아빠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멘즈논노나 일본 스트린 매거진들을 매일 보면서 자라왔어서 항상 사진과 일본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다른 사진에 비해 패션사진은 메이크 아티스트, 헤어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사진작가, 어시스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기획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공동작업이란 것이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매일 다른 현장, 매일 낯선 모델과 만나고 교감하고 촬영하는 게 너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했던 작가는 게리 위노그란드, 마틴 파, 우메카요, 테리 리차드슨, 유겐텔러가 있다.

사람 이름 잘 못 외우는 내가 이 정도 외우는 걸 보면 좋아하긴 좋아하는 듯 :)


유겐텔러의 마크제이콥스 캠페인이 정말 좋았다. 테리 리차드슨이 찍은 미우미우도 좋았고...


유겐텔러가 찍은 마크제이콥스
테리 리차드슨이 찍은 미우미우


늦은 나이에 결혼까지 하고 유학을 가서, 운동 없이도 살이 7킬로 빠질 만큼 열심히 했었다.

학교 선배님이나 교수님 어시스트로 현장에도 많이 갔었고, 주말에 열리는 세미나, 사진전도 정말 많이 갔던 기억이 있다. 누구든 만나면 그동안 찍은 사진을 봐달라고 보여주기도 하고...

선배에게 조언받은 대로 메이크, 헤어, 스타일리스트 관련 학과 교수님들한테 연락해서 학생들을 추천받아 팀을 만들어 모델 에이전시에 찾아가 사진촬영을 하고 싶다고 해서 1학년 때부터 포폴을 만들었었다.


아, 무슨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왔지...


사진을 참 좋아했다. 매일 남는 시간에는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보는 걸로 하루를 채웠다. 

학교 도서관 사서 아주머니랑 친해져서 새로운 사진, 다큐영상을 추천받아 보는 게 즐거움이었다.


생계를 위해서, 개발을 다시 시작하고 힘들었던 SI 시절부터, 갚아지지 않는 마이너스 100만 원 한도 통장을 갚으려고 아등바등 살던 때를 지나 그나마 조금 여유가 생겨 풍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도 않다 하고 생각이 들 정도가 되니, 역시 하고 싶은 건 사진하고 공부였다.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선생님이랑 많은 이야기를 했고

뭐 할 때 제일 즐겁고 행복하냐에 대해 이야기하다 사진 이야기가 나왔다.


왜 지금은 찍지 않나요? 하고 다시 해보면 어떻냐고 이야기해 주셔서 조금씩 다시 찍어보고 있는데,

이제는 팀을 꾸려 패션을 찍기엔 어렵겠지만, 그래도 파인더를 보고 순간을 기다렸다 찰칵하고 셔터를 끊는 그 기분은 여전히 좋다. 사진을 보고 맘에 들어하는 피사체를 보는 기분이 좋다.


관심을 갖고 보다 보니, 스냅촬영 사진가가 국내에 정말 많았다.

전업으로 하기는 어렵겠지만, 주변사람들부터 꾸준히 찍다 보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찍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의 열심히 듣고, 오랜만에 다시 재밌게 배우고 있다. :)


RF 카메라 메커니즘이 재밌어서,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막상 찍다 보니 P&S (Point & Shoot) 같은 스타일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AF 있는 렌즈나 똑딱이 카메라에 플래시 직광으로 팡하고 터트리는 사진이 좋다.


휴직을 앞두고 다들 어떤 계획이 있냐는 질문을 많이 했는데...

미리 비행기를 끊어둔 교토 말고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대신 매일매일 책을 고르고, 주문했다. 저녁마다 택배가 도착했고, 책장에 책이 한그득 쌓였다.

다행히 알라딘 헌책방에 상태 좋은 헌 책이 많아서 생각보다 돈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고,

와 이렇게나 볼 책이 많다니 하고 점점 배부른 기분이 들었다. 흐흐


이 위에는 만화책/투자, 아래는 기술서적들 2칸 더 있다. 책은 장르 구분 없이 막(?) 읽음


사진 찍는 것 다음으로, 책 읽을 때 기분이 좋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즈음엔, 활자를 잘 읽지 못했다.

이상했다. 책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읽으려고 펼치면 머리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고,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했다. 중간중간 휴대폰을 들어 슬랙을 확인하고, 알람을 확인하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으니 책 읽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좀 가라앉으니, 책도 잘 읽혔다.

쑥쑥 읽혀서 다음 책을 고르고, 또 책을 읽다가 다음에 읽을 책을 발견하고...

몸이 나타내는 다른 지표들 보다, 완독하는 책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에 독서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지만 아침 출근길 지하철 환승하면서 읽는 시간이 꽤 달콤했다.


책을 좋아하는 티를 트위터에 많이 내서 그런지 -_- 하하하

휴직선물(?)로 책을 받다 보니, 아 책을 선물로 받는다는 건 참 멋진 기분이군! 하는 생각도 들고... :)


보고 싶다! 생각했던 Computer architecture, 읽을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꼭 맘에 들었던 Escape from freedom 은 회사동료 라이너스의 선물 ㅠ_ㅠ
오늘은 회사 동료이자, 트친 똥멍청이님이 보내준 '식물에 관한 오해'가 도착했다.


휴직일기 001을 쓰고, 이틀차를 맞이했을 때 막상 쓸 일이 별로 없이 후라후라 보내다

아! 이러면 안 돼! 더 알차게!라는 마음에 뭐 해야 하나 노트에 끄적거리기도 했는데,


우연히, 이 영상 보게 되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ih2zXn8P7o 

진료 전 고나리자(?) 님의 상태

강지영 아나운서의 '고나리자' 정신과 진료 에피소드인데...

진료 결과를 요약하면,

* 지금 매일 열심히, 착실히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루틴들은 전부 숙제(?) 같은 면이 있다.

* 매일 정말 나 자신을 위해서, 즐거움을 찾는 시간,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잠깐이라도 있어주는 것이 살아갈 에너지가 된다. 

는 내용이었다.


휴식기간 동안 공부 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는데, 과연 이건 나를 위해서였을까?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것들은 그렇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아니기도 했다.


'해야 해서 하는 일' 중에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실은 하고 싶지 않은데도) 스스로 만들어 낸 일'도 있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원하는 일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휴식일기는 나를 위한 일인가? 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는데, 좀 더 써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지금까지는 쓰면서 기분이 좋다. :)

글을 쓰면서 풀리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그동안 참아두고, 아껴두었던 관종에너지가 발산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생활하면서, 오! 이건 일기에 써야겠군! 하고 메모하는 일이 많아졌다.

브런치에는 '작가의 서랍'이라는 draft 글을 모아두는 공간이 있는데, 생각보다 일상에서 '작가의 서랍'에 정리되는 꼭지들이 많았고, 별일 없어 보이던 내 하루가 꽤 많은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조금 더 쓰고, 조금 더 찍고, 조금 더 생각하고 그렇게 내일을 보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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