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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훈 Nov 22. 2021

기자와 상상력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최근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는 ‘상상력’이다. 예전에는 SF영화에 나올 법한 가상의 세계를 머릿속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력은 내가 서 있는 자리, 위치를 바꿀 때 새롭게 생성되는 다른 정치적 입장, 공간을 의미한다”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을 읽은 후부터 나는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주장을 나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상상력은 타인의 눈에 비친 세상과 타인의 발로 딛고 선 땅의 감촉 그리고 타인이 선 자리에서만 풍겨오는 냄새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유사어로 쓰이는 ‘공감능력’보다 더욱 치밀하고 정확해야 한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느끼는 것을 넘어 타인이 처한 사회·경제·신체적 조건을 최대한 일치시켜야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역지사지의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온전한 의미의 상상력은 나와 같은 종합일간지 기자가 물리적으로 갖기 힘든 능력이기도 하다. 날마다 쏟아지는 사건, 사고를 취재하고 마감하는 과정을 매일매일 처리하다보면 누군가의 입장을 상상해보기도 전에 이 모든 과정이 끝나버리기 일쑤다. 또 대부분의 기자들은 학력이 높은 편(대부분의 언론사에서 필수 요건으로 4년제 대학 졸업자를 내걸고 있다.)이고 일정 수준의 급여를 규칙적으로 받고 있다. 빈곤층으로 추락할 위험이 없는, 비교적 안정적인 계층에 속한다. 그런 이들이 다양한 사람들, 특히 빈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굴절 없이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당신이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보도를 멈추지 않는 것을 저널리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면 ‘기자와 상상력’이라는 화두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2001)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저서 <노동의 배신>(2001)은 저널리스트가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의 범위와 한계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논픽션이다. <노동의 배신>은 1990년대 후반 미국 정부의 복지 개혁으로 최하위 노동시장으로 내몰린 워킹 푸어(working poor)의 일과 삶에 관한 글이다. 그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워킹 푸어를 인터뷰하고 관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말 성실한 노동의 대가만으로 워킹 푸어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해 그녀는 특별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학력, 자산 등 계급적 격차에서 오는 ‘관점의 굴절’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다소 극단적이다. 지식인 중산층 계급의 삶을 잠시 버리고 직접 워킹 푸어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를 충동한 것은 기자로서의 양심, 정의, 이상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과학자라 여기는 그녀는 “책상에 앉아서 숫자나 굴리다가 생물학 박사 학위를 딴 것이 아니었기에 (워킹 푸어의 삶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직접 뛰어들어서 내 손을 더럽히는 것뿐이었다”고 말한다.


1998년 봄에서 초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던 시기에 그녀는 시간당 6~7달러를 받으며 살아가는 무주택 빈곤층의 중년 여성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삶은 2000년 초여름까지 무려 2년 씩이나 지속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미 유명 지식인이던 그녀는 자유 기고나 강연 같은 ‘고상한’ 노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레스토랑, 청소전문업체, 월마트 등의 비숙련 노동자로 취업한다. 마음만 먹으면 싱싱한 채소와 과일, 고기를 맘껏 사먹을 수 있었던 그녀는 하루 식비로 8달러만 지출하기 위해(그래야 생존이 가능하므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저렴한 정크 푸드를 사먹거나 종종 굶는다. 저택까지는 아니지만 정원이 딸린 안락한 집에 살던 그녀는 공동 화장실을 써야 하는 싸구려 모텔이나 원룸을 전전한다. 멀쩡한 승용차를 갖고 있던 그녀는 중고차를 렌트하거나 걸어 다닌다. 워킹 푸어에 거의 ‘빙의’된 삶을 살았던 그녀는 프로젝트가 끝난 후 “내 인생과 적어도 한참은 이별을 고하게 된 기간”이라고 회고한다. 일터만 바꾼 것이 아니라 자산, 환경 등 생활 전체를 바꾼 그녀의 방식은 어떻게 보면 다소 강박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치밀하고 사실적이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출처: Newyorker)


철저하게 과학적인 취재 방식은 그녀에게 남다른 상상력을 부여했다. 오직 그녀만이 건져 올릴 수 있었던 워킹 푸어에 대한 통찰은 충격적이며 참혹하기까지 하다. 비숙련 단순 노동은 힘들고 고되며 지루하다 혹은 건강한 음식을 충분히 먹을 수 없어 몸이 아프게 되었다 같은 수준의 감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매일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 노동에 헌신해도 빈곤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엔 ‘표시’가 남았고 그것은 ‘낙인’이 되었다. 노동의 대가가 구제해주지 못하는 가난의 흔적들은 그녀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서 획일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워킹 푸어들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되지 못하고 ‘게토’가 되는 과정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노동의 배신>에 따르면 가난은 사람들의 몸에 여러 흔적을 남긴다. 그녀가 일터에서 만난 동료 대부분은 ‘특유의 지치고 희망 없어 보이는 스타일’을 고수했다. 그들에게 옷이나 헤어스타일은 개인의 취향을 뽐낼 공간이 아니었다. 삐뚤빼뚤하고 누런 치아, 하나로 묶거나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 양옆을 실핀으로 꼽아 얼굴에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실용적인 헤어스타일…. 옷차림도 대부분 비슷하게 비위생적이며 단순했다. 월마트에서 일하고 있지만 월마트 매대에서 저렴하게 파는 티셔츠 한 장도 구입하려면 큰 맘을 먹어야 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얇고 뒤축이 없는 모카신을 신고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외출용과 작업용 신발을 구분해 신을 정도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몸을 치장할 여력만 없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월마트에서 상품 관리를 했던 그녀도 처음엔 동료와 손님을 ‘적극적으로 환대’했다. 하지만 어질러진 물건을 반복적으로 치우면서 그녀는 점점 ‘적극적인 적대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소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생활도 경험한다. 해고나 부당한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매니저급 관리자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노동자들은 시간 엄수, 청결, 명랑, 복종 같은 덕목을 내면화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겉으로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내몰린 그녀는 스스로 몰가치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글 중에서 이 대목이 가장 두려웠던 것 같다. 빈곤은 사람을 궁지에 몰고 궁지에 몰린 사람은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어렵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아량도 베풀지 못할 수 있구나. 그녀가 300페이지에 걸쳐 서술한 기록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적대적인 존재로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노동의 배신>의 원제는 Nickel and Dimed이다. '야금야금 빼앗기다' '근근이 살아가다'로 번역할 수 있다.


집도 차도 예·적금도 없이 워킹 푸어로 2년 간 살았던 그녀는 (자격을 꽤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거나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겪은 일과 느낀 감정을 담담하게 적어내릴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너무나 명징한 설명을 내놓는다.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원래의 나,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흥미롭고 극적인 생활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이다. 무려 2년이나 ‘이런’ 삶을 살았지만 이것은 현실이 아니며 돌아갈 안락한 삶이 있다는 걸 아는, 한 지식인의 '일시적인 체험'이었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그렇기에 진짜 워킹 푸어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갖게 되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감히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수기를 읽으면서 누군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직업으로서의 기자와 기자가 가져야 하는(혹은 가질 수 있는) 상상력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짧으면 한두 시간, 길면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 잠깐 관찰하고 인터뷰하는 것만으로 취재원들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고 빠짐없이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그녀를 통해 얻은 결론은 “그럴 수 없다”였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자는 건 아니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상력엔 한계가 있으므로 신중하고 겸허한 태도를 잊지 말자. 그래야만 좀더 진실과 진리에 가까운 사실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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