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리믹스 문화를 위하여
지난 4월 발매된 테일러 스위프트의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THE ANTHOLOGY]는 빌보드 200 12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21세기 팝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입증했다. 이로써 테일러 스위프트는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휘트니 휴스턴, 킹스턴 트리오에 이어 빌보드 200에서 10주 이상 1위 앨범을 3장 보유한 5번째 아티스트가 되었다. 체감하기 힘들만큼 놀라운 기록이지만 그녀의 커리어와 'The Eras Tour' 투어의 규모를 비추어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대부분의 아티스트가 그렇듯 이번 앨범도 1위가 지속될 수록 성적에 대한 납득과 의구심의 설전이 오갔고, 이번에는 비판의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커진 모양새다. 사유는 해당 성적이 편법으로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 거기다 탄탄한 팬덤 덕에 압도적인 초동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기록 경신을 위해 편법을 사용한 점이 주된 비판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케이팝 내에서도 편법으로 추정되는 리믹스 발매가 많아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르세라핌이 ‘CRAZY’ 발매 2주만에 총 15종의 리믹스를 발매한 뒤 해당 곡이 빌보드 핫100 2주연속 차트인에 성공하며 커리어 하이를 달성한 것도 리믹스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즉, 국내에선 과거 시상식이나 콘서트 등 특별무대에서나 선보이던 리믹스가 이제는 컴백과 동시에 우후죽순 쏟아지게 된 것이다. 어느덧 전 세계 아티스트에게 '성적을 위한 리믹스'는 필수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이미 편법으로 낙인이 찍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리믹스를 새로 제작하는 데에는, 성적과 별개로 리믹스가 주는 득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먼저 타 아티스트와의 콜라보가 주는 화제성이다. 위켄드와 아리아나 그란데의 'Save Your Tears'는 위켄드가 단독으로 부른 원곡보다 높은 성적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기록했고, 이후 위켄드의 'Die For You'가 틱톡에서 조금씩 인기를 끌자 또 한 번 아리아나 그란데와의 콜라보로 리믹스 버전을 발매했다. 그 덕에 이들의 콜라보는 필승조합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고, 오래전 발매된 원곡의 순위도 함께 상승할 수 있었다. 또, 위에서 언급한 르세라핌도 ‘CRAZY’의 다양한 장르 버전과 함께 핑크 팬서리스, 데이비드 게타와의 콜라보 버전을 선보였는데, 이로 인해 원곡 이상의 호평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시즌, 트렌드, 컨셉 등에 맞춰 다양하게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름에 발매된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Tropical Remix’로 제작되고,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Do It Like That’이 트렌드에 따라 ‘Jersey Club Remix’로 제작되었듯이 말이다. 또, 아일릿은 ‘Magnetic’을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라는 컨셉에 맞춰 흔히 사용되는 어쿠스틱이나 EDM 등이 아닌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떠오르는 반짝이는 감성의 ‘Starlight Remix’와 시티팝 요소가 첨가된 ‘City Night Remix’로 발매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리믹스가 관례 또는 팬들에게 다양한 감상을 선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성적’을 위한 이용 도구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빌보드는 일주일 간 실물 앨범의 판매 수량, 디지털 음원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 수, 라디오 에어플레이 등을 합산하여 순위를 매기는데, 이중 점수 비중이 높은 실물 앨범과 디지털 음원 구매만 신경 쓰면 순위 선점은 수월해진다. 이때, 리믹스는 오리지널 버전을 들은 것과 같게 측정되기 때문에, 곡이나 앨범이 차트에서 힘이 빠진다고 느껴지는 타이밍에 발매하면 순위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편법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자 충성도 높은 팬덤을 지닌 아티스트일수록 다량의 리믹스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 결과, 의미 없는 리믹스가 무한 양산되었고, 관례로 여겨지던 싱글의 리믹스 발매는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편법으로 과열되었다. 그에 따라 팬덤 중심의 차트화가 가속되었고, 성적만을 위해 공장처럼 찍어내던 탓에 퀄리티도 하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야 근 몇 년 사이 늘어난 추세지만, 미국에서 ‘성적을 위한 리믹스’는 예전부터 활발히 사용되던 관행이었다.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 ‘Telephone’, ‘Poker Face’나 브루노마스의 ‘The Grenade’, ‘Just The Way You Are’ 등 대부분의 히트곡이 한두 달 내로 리믹스 버전으로 나왔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다 2019년, 릴 나스 엑스의 ‘Old Town Road’에 빌리 레이 사이러스가 함께한 리믹스 버전이 원곡의 성적을 뛰어넘으며, 리믹스 버전으로만 빌보드 핫100 18주 연속 1위를 달성하게 된다. 리믹스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후부터는 차트 순위를 유지시키고자 주기적으로 인기 아티스트와 협업한 리믹스 음원을 발매했고, 이러한 방식은 2020년대 리믹스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며 국내에까지 뻗게 되었다. 국내에선 최초로 빌보드 핫100 1위를 달성한 ‘Dynamite’의 9종 리믹스를 시작으로 점차 많은 국내 아티스트가 성적을 겨냥한 다량의 리믹스 음원을 발매하게 되었다.
리믹스 편법 관련하여 떠들썩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방탄소년단이 있겠다. 처음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했던 ‘Dynamite’는 당시 카디비의 ‘WAP’을 제치고 3번의 1위를 기록했지만, 이 또한 리믹스 전략의 사례이기도 하다. 순위 유지를 위해 발매 후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10종의 리믹스를 풀며 낙폭을 조절했으며, 그에 따라 팬들도 1인당 N종의 리믹스를 구매하여 세일즈 수치를 부풀렸다. 실제로 3-4주 차에 하락했던 순위가 5주 차에 다시 1위를 탈환했을 때에는 전체 음원 판매 중 리믹스 판매 비율은 무려 52%에 달했다. 또, 지민의 ‘Like Crazy’는 솔로 곡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달성하는 유의미한 성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주 만에 45위를 기록하며 빌보드 역사상 가장 큰 하락을 보였다. 이 또한 세일즈에 의존한 점수였기에 리믹스를 내지 않은 2주차부터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또, 최근 비판을 받았다던 테일러 스위프트도 리믹스와 번들 판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세일즈 수치를 높였다.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THE ANTHOLOGY] 발매 바로 다음 날 31곡의 디럭스 버전을 발매하거나 빌리 아일리시, 찰리XCX, 잭 브라이언 등 톱 아티스트들의 컴백으로 1위를 뺏길 위험이 있을 때마다 리믹스 및 앨범 번들 판매, 다운로드 가격 할인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이번 앨범으로만 무려 63개의 번들을 발매했고, 그녀의 탄탄한 팬덤 덕에 12주간 1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이들과 같이 영향력이 큰 아티스트가 편법으로 성적을 유지하는 사례가 이어진다면 이는 곧 관행이 될 위험이 있으며, 가장 큰 문제는 차트 위신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2018년쯤 사재기 논란을 일으키면서 더 이상 국내 차트가 이전만큼의 힘이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이에 빌보드에서는 음원 및 앨범 중복 구매를 집계에서 제외하거나 싱글의 헐값 판매에 제동을 거는 등 꾸준히 차트 집계 방식에 변화를 주고 있지만, 의미 없는 곡 수 늘리기나 다량의 리믹스와 같은 허점을 이용한 편법은 아직 막지 못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편법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차트 구조에 있다면 시스템을 개선하면 될 일이다. 가장 악용이 심한 번들 판매부터 제재를 둔다거나 리믹스를 대상으로 다운 및 스트리밍 횟수에 제한을 두는 등 자주 문제를 일삼던 부분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구조가 개선되어야만 공장형 리믹스, 번들 판매가 아닌 건전한 리믹스, 앨범 판매가 가능해질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건 현실적으로 개선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앨범 스트리밍 수치를 높이기 위한 '의미 없이 곡 수를 늘리는 방법'을 막기 위해 수록곡 개수에 제한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세일즈 점수 반영에 제한을 둔다 한들 악용할 거리가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이 또한 허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티스트들 역시도 건강한 리믹스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SM엔터테인먼트 산하 댄스 뮤직 레이블 ScreaM Records에서 진행 중인 iScreaM 프로젝트(SM 아티스트 곡을 리믹스하는 프로젝트)와 뉴진스의 리믹스 앨범 [NJWMX]이 그 예시이다. ScreaM Records에서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실력 있는 프로듀서들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기회를 만들고, 아시아 시장에서 세계적인 DJ를 배출’한다는 목표하에 성적과 관계없이 꾸준히 리믹스를 제작하고 있다. 또, 뉴진스는 팬들을 위한 선물로 그간 발매된 모든 곡의 리믹스 앨범을 발매했는데, 해당 앨범에 수록된 6곡은 실시간 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아니면 아예 성적과 퀄리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리믹스 앨범을 제작해 보는 것도 좋다. 예시로 10년 간의 디스코 그래피를 담은 리믹스 앨범인 Justice의 [Woman Worldwide]는 Metacritic에서는 평균 69점을, Rate Your Music에서는 4점에 가까운 평균 점수를 받으며, 제61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리믹스를 성적을 위한 도구가 아닌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언젠가는 건강한 리믹스 문화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리믹스 하나만으로 차트를 단번에 개선하기엔 무리가 있을지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위켄드와 아리아나 그란데처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시도를 한다거나 계절감이나 컨셉에 맞춘 색다른 리믹스를 시도하는 등 선택과 집중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모두가 인정하는 성적과 매출’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by.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