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람된 생각으로는, ‘Next Level’이 이 팀의 최대 아웃풋일 거라 생각했다. 멜론차트에서 연간 4위를 기록하는 등 공전의 히트이기도 했고,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노래’를 차지하며 대외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를 기점으로 에스파는 한계를 뛰어넘어 케이팝의 선두에 있는 아티스트가 되었고, 팀의 한계를 무한 확장하고 있다.
SMP 그 자체였던 ‘Girls’ 이후 에스파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광야에 머무르던 세계관을 일차적으로 정리한 후, 리얼월드로 돌아왔다는 시즌2 서사를 맞이하며 [MY WORLD]와 [DRAMA]를 발매했다. 작년의 인수전으로 지난했던 SM의 상황과 당초 정규앨범이었던 계획이 무산된 것을 생각하면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주변 환경의 위기를 잘 극복했다. 그때 엎어졌던 정규 앨범은 심기일전하여 올해의 [Armageddon]으로 발매되었고, 음원차트에서 롱런하는 것은 물론 두 번째 단독콘서트까지 성공적으로 마치며 팬덤과 대중 모두를 사로잡았다.
특히 선공개 곡이었던 ‘Supernova’는 아직도 음원 차트 10위권(멜론 기준)에 있을 만큼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단조로운 비트에 얹은 ‘Ah Oh Ay’는 멤버들의 독특한 가창과 어우러져 킬링파트를 만들었고, 자칫하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소량 첨가되어 있는 키치함과 뮤직비디오의 재치까지 즐길 거리가 가득한 음악이었다.
앨범의 타이틀곡 ‘Armageddon’은 ‘Supernova’만큼의 대중적인 성과는 아니었으나 에스파의 음악 중 가장 맥시멀한 사이즈로 충격을 주었다. 화려한 변주와 쇳소리 가득한 사운드, 무겁게 늘어지는 멜로디와 치찰음 가득한 보컬이 어우러져 ‘에스파만 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자본력을 실감케하는 뮤직비디오도 백미였다. 한 신 한 신 마다 쏟아지는 그래픽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고,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강렬한 연출이었다.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의 퀄리티는 보는 음악의 기획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정수였다. 정규 앨범 한 장으로 소위 말하는 체급이 훌쩍 올라가버렸고, 올해 안으로 또 한 번의 컴백이 있다고 일찌감치 예고한 바 있기에 대중들의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2. 기분 좋은 뒤통수, 반전의 미니앨범
수많은 기대 속에서 컴백한 미니앨범 [Whiplash - The 5th Mini Album]은 열어보자마자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전작보다 더 많은 것, 더 화려한 것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했던 대중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리고 그 욕심을 내려놓는다. 타이틀곡 ‘Whiplash’는 르세라핌이 ‘CRAZY’에서 시도한 바 있는 하우스 장르를 속도감 있게 표현했다. 미니멀한 사운드가 강한 속도감을 만들어내고 곡 전반에 흐르는 시크함은 패션쇼의 캣워크를 떠오르게 한다. 하우스의 진입장벽을 고려한 것인지 멜로디 진행은 굉장히 단조롭고, 무심하다. 곡의 시작부터 나오는 ‘One look give 'em Whiplash’의 리듬이 다수 반복되고 그 깔끔함이 곡을 어렵지 않게 중화한다. 녹슬어 삽삽했던 철퇴가 정교한 커팅으로 가공된 순간이다.
미니멀해진 것은 오디오뿐만이 아니다. 뮤직비디오 또한 우리가 알던 에스파의 모습을 과감히 버린다. 쏟아지는 효과와 화려한 배경을 모두 걷어내고 단색의 하얀 배경을 택했다. 오로지 촬영 구도와 멤버의 배치를 활용하여 곡의 시크하고 쿨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aespa - 'Whiplash' (MV)
‘Whiplash’에서 꾀한 반전은 다음 트랙인 ‘Kill It’을 통해 이내 에스파로 복귀한다. [Armageddon]의 ‘Set The Tone’이나 [Drama]의 ‘Trick or Trick’, [MY WORLD]의 ‘Salty & Sweet’처럼 앨범 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는 없으면 아쉬울 에스파의 ‘쇠 맛’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문 같은 곡이다.
aespa - Flights, Not Feelings [더 시즌즈-이영지의 레인보우] | KBS 241101 방송
SM의 여전한 정통성을 보여주는 지점도 존재한다. ‘Flights, Not Feelings’나 ‘Flowers’는 후반부의 S.E.S.나 동방신기의 수록곡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우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알앤비 트랙이다. 알앤비를 소화하는 멤버들의 매력적인 보컬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유영진의 딸’이라 불리기도 하는 윈터의 소화력이 대단하다. 마지막 트랙으로 쉬운 멜로디 진행의 펑키한 락 ‘Just Another Girl’을 배치하여 안정적으로 마무리되는 케이팝 앨범의 전형을 조금은 따라주는 모습이다. ‘Whiplash’의 하우스와 메탈릭한 분위기가 끝까지 가지 못하고 흐름이 깨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아무리 광야의 사이버 전사라도 가끔은 풀어지고 싶은 법이다.
화려함의 극치에서 덜어냄의 미학까지, 에스파는 대중음악이라는 분야의 범위를 점점 넓혀가고 있다. ‘Girls’에서 ‘Spicy’, ‘Drama’에서 ‘Supernova’, ‘Armageddon’에서 ‘Whiplash’까지 모두 눈에 띄게 변화했음에도, 그 간극이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다. 대중으로 하여금 ‘갑자기?’라는 의문보다 ‘새롭다’, ‘신선하다’라는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계속해서 ‘이 다음의 에스파’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대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생명력과 롱런의 기반이다.
3. 광야? 리얼월드? 에스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앞으로의 에스파는 어떨까. 개인적인 바람을 더하자면 탄탄한 안정성을 기반으로 회사의 기획력을 통한 다방면의 시도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반가운 것은 에스파의 퍼포먼스 퀄리티가 점점 향상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의 ‘Supernova’, ‘Armageddon’, 그리고 ‘Whiplash’까지 댄서 신에서도 에스파의 퍼포먼스를 주목하고 있다.
이거 에스파 맞음..?⎪aespa Whiplash 위플래쉬 / 루다의 댄스 연구소 Ruda's Dance Lab
뻔하지 않고 신선한 동작으로 채운 안무와 댄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만들어 낸 다양한 포메이션을 호평했다. 메인보컬이라 잘 두드러지지 않았던 닝닝의 훌륭한 춤 실력도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발전하는 멤버들의 실력을 바탕으로 춤 자체의 난이도도 계속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멋진 퍼포먼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Black Mamba’ 때부터 고수해온 세계관이 어떤 식으로 변모할지도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Next Level’-‘Savage’-‘Girls’까지 무지성으로 집어넣던 ‘광야’나 ‘naevis’가 최근의 곡들에선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세계관의 분위기만 풍기고 있는데, 얼마 전 데뷔까지 해버린 ‘naevis’를 활용해 또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전에는 에스파라는 팀보다 SM엔터테인먼트의 큰 그림이 먼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에스파는 멤버 한 명 한 명의 퍼포먼스를 통한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 구축과 음악적인 성취를 통해 쉽게 넘보기 힘든 독자적인 영역을 견고히 하고 있다. 내년 중 출격할 것으로 알려진 SM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걸그룹과 차별화를 두기에도 좋은 전략이다. 광야로 떠나든, 리얼월드에 있든 그들의 좋은 퍼포먼스가 계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