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짝한 레이지’라고 들어보셨나요?
장르 음악 마니아들이 포진된 음악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보면 '장르 논쟁'이 활발히 일어나는 걸 목격할 수 있다. 이들은 신생 장르의 정의와 예시를 판가름하거나 앨범과 곡의 장르를 정의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곤 한다. 사실 이들이 전투적으로 분석하는 세부 장르들은 약간의 디테일 차이로 편의상 라벨을 붙인 형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한 장르가 가진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그걸 기반으로 한 하위 장르, 그리고 서브 장르와 서브 장르가 만나 또 다른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러한 과열된 장르 논쟁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 장르의 탄생은 멈출 줄 모르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트랩에서만 해도 2020년 들어 전 세계 힙합 씬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드릴, 레이지, 플러그가 하위 장르로 파생되었으니 말이다. 세 장르 모두 트랩의 일부분은 공유하지만, 각각의 특징이 얹어지면서 또 다른 새로운 장르가 된 셈이다. 드릴은 특유의 '탓 탓탓 탓 탓탓'거리는 하이햇 리듬과 베이스 슬라이드를, 레이지는 정신없이 난무하는 전자음과 이펙팅한 보컬을, 그리고 플러그는 차가운 신스를 활용하며 각각의 새로운 장르가 되었다. (이후 플러그는 R&B와 결합해 플럭앤비로 발전하며 트렌드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신생 장르의 탄생이 활발히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 트랩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 바로 '뉴재즈'이다.
이름에서부터 재즈의 향이 강하게 풍길 것만 같은 뉴재즈는 트랩에서 파생된 힙합의 한 종류로, 재즈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는 'Nu Jazz'와는 관련 없는 별개의 장르이다. 레이지의 시작이었던 Trippie Redd의 'Miss The Rage'에서 이름을 가져와 장르가 시작됐듯이, 뉴재즈라는 장르명 역시 해당 사운드를 중심으로 제작된 최초 앨범인 LUNCHBOX의 [New Jazz]에서 시작되었다. 언뜻 들으면 레이지라는 착각이 들만큼 상당히 유사한 사운드를 보이지만, 레이지처럼 공격적으로 난무하기보다는 플럭 또는 부드러운 샘플링을 활용하여 레이지의 사운드를 좀 더 순화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레이지가 강렬한 비트와 공격적인 랩핑, 자극적인 신스로 사운드의 맥시멀리즘을 구현했다면, 뉴재즈는 좀 더 간단하고 반복되는 루프 위주의 진행을 보인다. 쉽게 말해, 플럭과 레이지의 사이로 이해할 수 있으며, 플럭 특유의 뿅뿅 거리는 사운드로 인해 '뽀짝한 레이지'로 불리기도 한다.
뉴재즈의 대표 아티스트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건 단연 Lil Tecca이다. 그는 2019년 'Ransom'이라는 곡으로 빌보드 핫100 4위를 기록하며 단번에 유명세를 얻었으나, 이후 발매되는 음악들이 큰 반응을 얻지 못하며 인기는 주춤했다. 그러다 2023년, '500lbs', 'TEC' 등 뉴재즈를 시도했던 정규 3집 [TEC]가 빌보드 차트에 입성하면서 과거의 명성을 다시 되찾았고, 그후 'Down With Me'와 ‘NUMBER2’ 등을 통해 뉴재즈 대표 아티스트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그가 뉴재즈를 대중적으로 알린 후에야 Rate Your Music의 장르 카테고리에 뉴재즈가 등록되기도 했다.
외에도 amir pr0d, LUNCHBOX, Kyra, tenseoh 등 해외에서는 많은 아티스트가 뉴재르를 시도하는 중이다. Lil Tecca의 [PLAN A], Kyra의 'hata', tenseoh의 'heartburn', Heygwuapo의 'Met Her' 등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뽀짝한 레이지'라는 표현이 좀 더 직접적으로 와닿을 것이다. 또, 뉴재즈 곡 가운데 레이지의 신스를 건반 또는 브라스로 대체하여 재즈와의 연관성도 희미하게 띠는 곡들도 나타나고 있는데, 뉴재즈 대표 곡으로 불리우는 Lil Tecca의 'Down With Me'나 Don Toliver의 ‘DEEP IN THE WATER’, ericdoa의 ‘kickstand’이 그 예시이다.
이처럼 해외에서 뉴재즈가 탄생하고 활발히 사용되었던 데에 반해, 아직 국내에서는 그 움직임이 크게 닿지 못한 듯하다. 현재로서는 김상민그는감히전설이라고할수있다의 '무한의 계단'이 국내 힙합 씬에서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대중적 인지도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거기다 해당 곡을 제외하면 앨범 '좋아요' 수가 10개 안팎을 맴도는 수준의 언더그라운드 래퍼인 Userskin1의 ‘Sarin’, 'Daily'와 Jaynolimitss의 'It's New Jazz' 정도만 겨우 발견되니 말이다. 그러나 한 달 전, 메이저 씬에서 처음으로 뉴재즈 곡이 발매되면서 힙합 커뮤니티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해당 곡은 BIG Naughty와 키드밀리의 'Downtown'으로 이들의 신보는 국내 힙합에서도 본격적으로 뉴재즈를 시도한다는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나, 그저 Lil Tecca의 ‘Down With Me’ 카피일 뿐이라는 부정적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대다수가 인정할 정도로 유사한 진행은 Lil Tecca라는 안전을 택한 아쉬운 결과인 동시에 장르 자체에서의 아쉬움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Lil Tecca라는 메인스트림 래퍼가 힙합 씬에서 뉴재즈를 성공적으로 선점하면서 자연스레 '뉴재즈=Lil Tecca'라는 공식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특별한 것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잔상에 묻히는 수순을 밟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Userskin1의 음악 역시 Lil Tecca의 뉴재즈에 그 이상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고 레이지를 들으면 Playboi Carti가 먼저 연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재즈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레이지와 유사성을 띠지만 레이지의 단점이 보완된, 그리고 좀 더 유연한 확장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이다. 레이지의 경우 최신 트렌드로 꼽힐 만큼 핫한 장르로 여겨지지만, 특유의 자극적인 사운드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뻔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또한, 오래 소비하거나 앨범 단위로 감상하기에 약간의 피로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뉴재즈는 레이지의 재밌는 포인트는 가져가되 좀 더 순화하여 팝적인 느낌까지 더한 장르이기에 상대적으로 편안한 감상은 물론, 확장 가능성도 더 크게 열려있다. 아마도 누군가 새로운 뉴재즈를 제시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Lil Tecca 카피에 머무르는 수준이 아닌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뉴재즈에서 아무런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фрози(frozy)의 'Joy'나 joyful와 함께한 'bounce'는 뉴재즈와 하우스를 결합하였고, Wolfacejoeyy의 'What Do U Do'는 뉴재즈와 저지클럽을 합치는 등 전자 음악 장르와 섞으며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하우스나 콘템포러리 알앤비 등 다양한 장르가 콜라보하기 좋은 이유 역시 레이지보다는 순한 맛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따라, 이미 언더 씬에서는 조금씩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메이저 씬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뉴재즈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장르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무색하게도 꾸준히 신생 장르가 생긴다는 건 어쩌면 음악의 확장성이 무한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특히, 트랩과 같은 스테디셀러의 경우 오래전부터 하위 장르를 만들어 낸 만큼 앞으로도 신생 장르의 탄생은 분명 계속될 것이다. 한 끗 차이일 뿐이지만 레이지에 속하지 않고 뉴재즈라는 장르가 탄생했듯이 말이다. 다만, 하나 우려되는 건 이러한 레이지류의 음악처럼 장르를 구성하는 요소가 많고, 뚜렷한 사운드일수록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 한 틀에 갇힌 채 비슷한 음악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뉴재즈가 냄비처럼 빠르게 끓다가 식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뻔하다는 인상이 생기기 전에 새로운 확장성을 제시해야만 한다.
by.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