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의 ‘APT.’가 제시한 B급 음악의 미래
‘APT.’의 성적표에 국내 여자 솔로로는 최고 기록인 빌보드 HOT100 8위, 오피셜 싱글 차트 2위라는 글자가 적히고, 국위선양이라는 코멘트까지 달리게 된 데엔 ‘B급 감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술 게임이라는 특이한 소재와 “아파트 아파트”를 반복하는 중독적인 후렴구, 화려한 세트 없이 춤추고 노는 모습으로만 채운 뮤직비디오까지. Bruno Mars라는 거대한 피처링을 제외하면 대중이 예상했던 ‘블랙핑크 로제’의 스케일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로제의 이러한 시도가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인 것은 아니다. 최근 숏폼과 댄스 챌린지 유행 등의 영향으로 더더욱 B급 감성 음악들이 흥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라탕후루’, ‘잘자요 아가씨’와 같은 곡들을 예시로 들 수 있는데, 대부분 음악에 잘 쓰이지 않는 생활 밀접형 가사와 함께 한 번만 들어도 쉽게 잊히지 않는 중독성 있는 리프 중심의 멜로디, 컨셉츄얼하면서도 따라 하기 쉬운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숏폼에서 곡이 많이 쓰였던 몇몇 유튜브, 틱톡 크리에이터들이 공개한 음원 수익은 유명한 작곡가들의 음원 수익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을 정도이니, 이미 B급 감성 음악의 흥행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기존의 블랙핑크와도, 각자 솔로로 찢어진 멤버들과도 차별되는 ‘로제’로서의 확실한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을 상황에서, 그 누구와도 겹치지 않으며 직관적인 ‘APT.’야말로 충분히 납득되는 전략이다.
사실 우리가 흔히 B급 감성이라고 말하는 음악들은 숏폼과 댄스 챌린지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흥행해왔다. 크레용팝의 ‘빠빠빠’, 싸이의 ‘강남스타일’, 오렌지 캬라멜 등, 우리 머릿속 B급 감성 음악의 이미지를 정립하였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음악들은 앞서 언급한 최근의 예시들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음악들이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들이 이런 세련되지 않은 음악을 시도하는 이유는 뚜렷하다.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앞서 말한 예시들은 모두 대중들에게 그 곡을 이해하고 즐기기 위한 음악적 배경지식, 예술적 감각 등을 요하지 않는다. 오로지 중독적인 멜로디 위에 입혀진 “탕탕 후루 후루”, “까탈레나” 등의 유치한 가사로 좋든 싫든 일단 듣는 사람의 기억 속에 박혀버린다. 이러한 곡들이 대부분 해당 아티스트의 데뷔곡이거나, 이름을 알리게 된 첫 곡인 경우가 많은 것도 아마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한 특이한 가사로 인해 BGM으로 자주 쓰이거나 안무를 따라 추는 영상들과 같은 2차적 저작물을 통한 홍보 효과 역시 제작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매력적인 기대점일 수 있다. ‘APT.’ 역시 로제가 YG를 나온 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보인 곡임과 동시에 현재까지도 수많은 아파트 챌린지 영상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전략이 성공했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 또한 여기서 발생한다. 앞서 말한 장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음악이기 때문에, 리스너들은 ‘감상’만을 위해 그 곡을 재생하지 않는다. 틱톡 뮤직 및 인스타그램 인기 상승 오디오에서는 1위를 했지만 멜론에서는 539위에 그친 ‘마라탕후루’처럼, 최근 숏폼용 음악이라고 불리며 화제가 되었던 ‘그러세요 그럼’, ‘홍박사님을 아세요?’, ‘미룬이’ 등과 같은 곡들은 모두 소셜미디어 차트와 스트리밍 플랫폼의 차트에서 상반된 성적을 거뒀다. 춤을 추거나 영상을 찍지 않으면 이런 곡들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APT.’가 어떤 음원차트에서든 높은 성적을 기록한 것은 이 단점을 어느 정도 상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선 ‘로제’와 ‘Bruno Mars’라는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가진 기술 및 인력 풀에서 오는 기본적인 퀄리티의 차이는 소재에서 오는 B급 감성이 무색해지게 한다. ‘헤이미키’로 유명한 Tony Basil의 ‘Mickey’를 샘플링한 팝 록 장르 위에 얹어진 장난꾸러기스러운 콘셉트와 파워풀한 브릿지의 고음, 그리고 풍부한 화음과 코러스로 절정을 장식하는 작법은 ‘Locked out of Heaven’, ‘Runaway Baby’와 같은 Bruno Mars의 초중반기 곡들과 닮아 있어, 대중들이 이 곡을 보다 ‘음악’이라고 느끼도록 한다. 그러니 숏폼 및 미디어 활용은 당연하고 리스너들도 충분히 스트리밍도 할 만하다고 느끼는, 마치 ‘B급_감성_음악_2024_진화ver.flac’처럼 들리는 것이다.
‘APT.’의 흥행은 또 다른 ‘APT.’가 계속해서 차트에 진입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 현상을 음악 산업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어쩌면 B급 감성 음악이라는 것이 이제는 정말 퀄리티도 B급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높아진 질적 수준은 유지하면서도 소재의 다양성을 넓혀 창의적인 음악이 더 많이 탄생하게 되는 창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여러 가지가 우려되기도 한다.
숏폼의 영향으로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짧아지기 시작한 곡 길이(‘APT.’의 러닝타임 역시 2분 49초이다)와 더불어 B급 음악 특유의 감정적 한계는, 소재적인 측면과는 반대로 음악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저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음악들이 계속해서 흥행하게 된다면 음원 차트는 더더욱 획일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영향력 있는 음원 차트들 속에서 라틴, 일렉트로닉, 컨트리 등 다양한 장르 음악들이 꽤 큰 존재감을 보여줬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대중과 장르 음악 씬은 멀어지고, ‘요즘 음악은 다 똑같아’라는 감상평과 함께 차트 중심으로 음악을 듣는 리스너들은 점점 더 음악 감상에 흥미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B급 감성이 가지는 생명력이 길지 않다는 한계점 또한 존재한다. 소재가 독특하고 강하게 기억에 남는 만큼 아티스트는 이에 쉽게 매몰되고 리스너는 쉽게 질리게 되며, 이는 결국 음악 감상의 질과 아티스트의 커리어 모두를 파괴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흥행과는 별개로 로제의 다음 앨범이 이런 감성으로만 채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어떤 산업이든 소비자 없이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공급자인 아티스트는 소비자인 리스너가 만족할 만한 질 좋은 음악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이탈하지 않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공을 위한 전략적인 콘셉트가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이 음악이 과연 산업의 발전에 있어, 본인의 음악적 커리어에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한 번씩만 더 고려해 준다면 세상에 더욱 다양하고 재밌는 음악들이 많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by. 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