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속 오류와 오해
케이팝 씬에 불었던 복고의 바람은 그칠 줄 모르는 듯하다. 컨템포러리 알앤비, 크렁크, 뉴잭스윙, 아틀란타 베이스 등 90년대와 00년대에 유행했던 장르를 빠른 시간 내로 모조리 휩쓸어 버린 걸로 모자라, 어느새 1980 ~ 90년대의 클래식한 힙합으로까지 닿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이 연상되는 이 스타일은 23년 SHINee의 ‘Hard’같은 곡에서는 포인트를 주는 활용 정도에 그쳤지만, 24년 3월엔 YOUNG POSSE (이하 영파씨)의 ‘XXL’을 통해 메인 장르로 채택되며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NMIXX (이하 엔믹스)의 ‘별별별’, aespa (이하 에스파)의 ‘Armageddon’, 최근 발매된 tripleS (이하 트리플 에스)의 ‘Hit the Floor’까지, 현재 케이팝 씬에서 놓치면 안 될 장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곡들 외에도 미스틱스토리의 신인 그룹 ARrc나, 태민의 앨범 수록곡 등에서도 본 스타일의 곡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음악 스타일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아직까지 충분한 논의와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복고 힙합’이라는 키워드 내에서 본다면, 90년대를 양분했던 ‘이스트 코스트 힙합’ 혹은 ‘웨스트 코스트 힙합’에 속하게 될 테지만 기존 우리가 생각하는 이스트와 웨스트에 빗대본다면 그 어디에 속하기도 애매한 느낌이다. 이스트 코스트라면 조금 더 건조하고 하드한 붐뱁이여야 할 것 같고, 웨스트 코스트라면 영파씨의 ‘Ate That’과 같은 지펑크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나마 이러한 음악을 얘기할 때 대부분 공통적으로 쓰는 키워드는 ‘올드 스쿨’ 정도 일텐데, 안타깝게도 이 키워드 역시 해당 스타일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할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올드 스쿨’이라는 단어의 뜻을 전혀 다르게 써오고 있었다.
올드 스쿨이라는 단어에 대해 논하려면, 고리타분하지만 힙합의 역사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힙합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흔히들 현대의 힙합을 비판할 때, “힙합의 시작은 저항이고 메시지인데, 요새 힙합은 그런 게 없다.”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쉽게도, 힙합의 시작은 저항이 아니었다. 힙합은 70년대 말 ~ 80년대 초의 파티 음악을 기원으로 한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힙합곡으로는 Chic의 ‘Good Times’를 샘플링했던 Sugarhill Gang의 ‘Rapper’s Delight’이 있으며, 대부분 디스코 비트 위에다가 별 뜻 없는 가사로 랩을 하곤 했다. 물론 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의 ‘The Message’처럼 진지한 메시지의 노래도 있긴 했지만, 이 곡 역시도 사운드와 작법만큼은 디스코의 그것을 따른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Run DMC 같은 팀은 디스코 샘플링이 아닌 신디사이저와 드럼 머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되고, 때로는 락 사운드까지 차용했으며, 나아가 Public Enemy는 본격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사회 저항’이라는 메시지를 앨범 전체적으로 담기 시작한다. 이전까지의 힙합은 파티 음악이었다면 80년대 중반부터의 힙합은 조금 더 ‘길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올드 스쿨’이라는 단어는 과연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대부분은 Run DMC, 혹은 Public Enemy의 등장 전후로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을 나누곤 한다. 그들은 기존 힙합의 작법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며, 가사에서도 랩퍼만의 의식, 생각을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힙합 팬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으로 초기의 디스코 샘플링 스타일의 곡을 ‘올드 스쿨’이라 부르며, 80년대 중반의 드럼 머신, 신디사이저, 락적인 스타일의 비트와 거친 랩핑이 들리는 스타일은 ‘뉴 스쿨’ (혹은 ‘미드 스쿨’)로 부르곤 한다. 최근 허클베리피나 미국의 Joey Valence & Brae라는 팀은 이러한 뉴 스쿨 스타일의 힙합을 제대로 구현해서 큰 호평을 받았다. 즉,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올드 스쿨’이라는 단어는 사실 완전히 다른 시대상을 지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뉴 스쿨의 다음 시대를 지칭하는 워딩은 ‘골든 에라’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를 지칭하며, 말 그대로 힙합의 ‘황금기’였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중 가장 유행했던 장르는 붐뱁으로, 말 그대로 묵직한 드럼비트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장르이다. (붐뱁이라는 단어 자체가 드럼 소리의 의성어이다!) 드럼 리듬 위에 반복되는 루프들로만 비트가 구성되기 때문에 사운드도 다채롭기보다는 미니멀하며, 주로 웨스트 코스트보다는 이스트 코스트에서 자주 쓰인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Nas의 ‘N.Y State of Mind’, Mobb Deep의 ‘Shook Ones Pt. II’ 같은 곡들 말이다. Nafla가 ‘Wu’의 가사 속에서 본인을 “뉴스쿨에서 붐뱁의 트렌드 세터”라고 지칭했던 것은 역시 뉴스쿨과 골든 에라의 붐뱁이 다름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쓸 수 있던 워딩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스트 코스트 붐뱁 역시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 영파씨의 ‘XXL’와 같은 곡과는 매우 다르게 들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보자. 그렇다면 ‘Come Back Home’, ‘XXL’과 같은 스타일은 대체 어떤 장르로 지칭해야 할 것인가? 해답은 ‘웨스트 코스트’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골든 에라의 붐뱁 대부분은 이스트 코스트 씬에서 사용되긴 했지만, 웨스트 코스트의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붐뱁을 시도한 경우가 더러 있다. 음악적 특징으로는 DJ 스크래치나 묵직한 드럼 루프 위주로 곡이 전개된 점은 두 지역 다 동일하지만, 이스트 코스트가 주로 재즈나 블루스, 소울 계통의 샘플링을 사용하며 베이스 라인이 (상대적으로) 단조롭다면, 웨스트 코스트의 붐뱁은 찌를듯한 신디사이저 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베이스 역시 조금 더 드럼 사이사이를 채워주며 그루브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편이다. 지펑크로 유명한 지역이니만큼 지펑크적 작법, 웨스트 코스트만의 작법을 묵직한 드럼과 융화해낸 것이다. ‘Come Back Home’이 표절했다는 논란까지 번졌던 서부의 힙합 그룹 Cypress Hill의 ‘Insane The Brain’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웨스트 코스트 붐뱁의 예시는 셀 수 없이 많다. 앞서 말한 대표적인 아티스트 Cypress Hill의 경우 ‘Insane The Brain’ 뿐 아니라 ‘I Ain’t Goin’ Out Like That’, ‘Throw Your Set In The Air’를 비롯한 수많은 곡에서 해당 스타일을 뽐냈으며, 웨스트 코스트의 대부 Dr. Dre 역시 ‘The Day the Niggaz Took Over’, ‘A Nigga Witta Gun’ 혹은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Deep Cover’와 같은 곡에서도 유사한 바이브를 느낄 수 있다. 그 외에도 Ice Cube, 2Pac의 몇몇 곡, 혹은 N.W.A의 2집 [Efil4zaggin]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Come Back Home’과 닮아있는 곡들이 존재하고 말이다. 유의해야 할 점은 모든 웨스트 코스트의 붐뱁이 해당 스타일의 곡은 아니라는 것. The Pharcyde나 Souls of Mischief와 같은 팀은 웨스트 코스트 붐뱁에 재지함을 더했고, 2Pac이나 Ras Kass은 조금 더 진지함을 더했을 뿐인데 ‘Come Back Home’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기도 한다. 반면 지금 소개하는 음악들은 락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사운드가 거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정확히 명칭 하자면 ‘웨스트 코스트 붐뱁’에서 ‘하드코어’, 혹은 ‘갱스터스러움’을 더 한 음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시대가 지나며 장르를 정의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대두되기도 하며, ‘올드’와 ‘뉴’라는 세대 구분을 예전 방식 그대로 적용하는 일 자체가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당장 케이팝에서도 ‘1세대’와 ‘2세대’의 구분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위가 넓어지는 만큼, 힙합에서도 ‘올드 스쿨’이 함의하는 시대가 조금 더 넓어진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올드 스쿨’이라는 단어가 특정 시대를 구분한다기보다 힙합계에서 ‘레트로’라는 단어 대신 사용하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느낌도 있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분을 알고 사용하는 것과 모른 채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를 것이다. 현재 케이팝에서는 이러한 스타일에 대한 명확한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곡을 소개하고 정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에스파와 엔믹스는 ‘Armageddon’과 ‘별별별’을 올드 스쿨하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영파씨의 ‘XXL ‘속 가사에서는 “Shimmy Shimmy Ya”, “Wu-Tang Clan”과 같은 워딩을 쓰기까지 하며 자기네들의 음악의 뿌리가 마치 이스트 코스트에 있는 양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붐뱁’이라는 키워드만 사용한 트리플에스가 그나마 선방한 셈이다. 이렇게 충분한 이해 없이 아티스트마다 소개하는 키워드가 천차만별이라면, 케이팝을 통해 장르를 접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혼동과 무지를 안길 뿐이다. 아무리 장르와 세대, 지역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이것저것 섞인 음악이 주도하는 시대라지만, 장르 음악을 다룰 때만큼은 최소한의 공부만큼은 필요하지 않을까?
By 베실베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