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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큐레이터 Nov 25. 2022

방황의 역사

Chapter 2. 요리사의 꿈을 한 달 만에 접다

2005년 방영된 화제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기억하는가? 평범한 외모에 노처녀 삼순이가 재벌 연하남 삼식이 (현진헌)를 만나며 벌어지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다. (30살이 어디가 노처녀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삼순이는 항상 사랑스러웠다) 



이때 처음 알았다. 디저트를 만드는 '파티시에'라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살을 빼요?! 라며 역정을 내던 삼순이를 기억한다. 언제부터 빵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삼순이가 디저트로 만들어낸 작품이 내 눈에 꽤나 멋져 보였다. 


삼수니는 빵을 구울 때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요리를 동경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집에서 빵을 굽질 않나, 티라미수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주기도 하고, 비스킷을 구워 선물로 주기도 했다. 디저트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좀 기뻤다. 



요리에 대한 내 마음에 불을 지핀 2번째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2010년 방영된 드라마 파스타. 아직도 이선균 배우님을 성대모사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명대사 '봉골레 하나!'가 있다. 난 그때 집에서 알리오 올리오와 봉골레와 같은 파스타를 만들곤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요리에 재능이 하나도 없었지만, 요리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덜컥 가버렸다. 요리학과로...

이때부터 공효진 배우님은 '공블리'가 되었다. 파스타 열풍과 함께


지금 생각해도 정말 무모했다. 사실 수시를 쓸 정도의 학생부 성적도 안되었고, 정시로 들어가기엔 처참한 점수였다. 어차피 어지간한 전문대도 힘든 수준... 그럼 하고 싶은 거나 하자며 조리학과를 써버렸고, 붙었다.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 조리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도, 우리 부모님도. 요리의 길이 쉽지 않다며 다시 생각해보라 했지만 내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나도 간혹 내 고집을 못 이길 때가 있다. 세계 최고의 '푸드스타일리스트'가 되겠다며 진학했고 난 정확히 한 달 만에 자퇴를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골목에 Y대의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과잠을 입은 그들을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어차피 공부 못한 건 난데 왜 자괴감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요리를 배우면서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 같다. 



요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요리' 자체가 전부인 줄 안다. 하지만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결이다. 정말 열심히 닦았다. 그때 청소하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집에서나 밖에서 설거지를 할 때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뒷 마무리를 한다. 청소는 그렇다고 치자. 요리 도구들이 꽤 무겁고 식재료들도 매우 무겁다. 프라이팬으로 웍 연습을 하다가 팔목이 나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요리를 그만두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공포심'이었을 것이다.



동기들은 대다수 고등학교 때 이미 요리를 전공한 친구들이었는데 그런 친구들도 조리 연습을 하다 다치기 일쑤였다. 어느 날 동기 친구 하나가 피를 철철 흘리며 손가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장면은 생전 처음이었다. 친구는 애써 웃었지만, 나중에 듣고 보니 칼에 검지 손가락이 깊게 베여 손톱이 들릴 정도로 상처가 컸다고 한다.



그때 덜컥 겁이 났고 매일 과제로 당근을 채치면서 현타가 왔다. 평생 공부만 하던 애가 요리가 익숙할 리가 없는데 환상만 보고 들어간 대학 생활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래도 입학한 지 한 달 정도면 등록금을 1/3은 돌려준다. 천만다행이었다.



자퇴서를 제출하고 중식에 능한 담당 교수님을 만났다. ' 너 왜 갑자기 그만두니?'

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그때 교수님이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씀하셨다.

'많이 힘들었구나.'



맞다. 지금은 덤덤히 글을 쓰지만 그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다른 친구들은 11월부터 재수 준비를 하는데 나는 이미 6개월 정도 늦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시 시작해보겠다면 서울 노원에 위치한 재수학원들을 돌아다녔었다. 이미 늦었기에 자리가 없었지만 한 학원에서 그래도 자리가 있다고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매달 재수학원 비용이 꽤 컸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집이 부유한 편은 아니지만 매달 재수학원 비용을 부담해달라고 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이미 내 잘못된 선택들로 인하여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경제적 부담까지 안겨드릴 순 없었다. 그날 재수학원을 나와 지하철역에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자책감과 재수를 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 앞으로 혼자 재수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지하철 개찰구 쪽에서 혼자 앉아 엉엉 울었다.


그렇게 나의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꿈은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그때 크게 데었던 탓에 지금도 요리하는 게 즐겁지 않다. 물론 한 번씩 하면 맛이 있긴 하다. 그때 익혔던 칼 실력으로 볶음밥은 기가 막히게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퇴할 수 도 있고, 재수할 수도 있는데 왜 그리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그런 두려움과 맞서 본 적이 없어서 무섭기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때 경험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경험으로 요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힘들게 버티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다. 2년을 다니고 깨달았으면 그 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또 낭비했을테니까.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단 한 개도 없다. 결국 그 경험으로 인해 나는 배우고 또 성장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고3, 재수생들은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은 생각보다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고 온갖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그게 꼭 여러분의 탓이 아니니 염려 마시길. 그때 겪은 고통과 낙담은 생각보다 여러분을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주니까.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면 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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