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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ug 08. 2023

복원과 재건: 무너짐을 만났을 때

<피닉스(2014)>와 <헤어질 결심(2021)>의 붕괴된 사랑

   무언가가 무너졌을 때 우리는 복원 혹은 재건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둘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복원을 원래로의 회귀라고 한다면 재건은 원래로부터의 덧붙임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대개 재건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복원을 바라는 것 같다. 무엇이 덧붙여질지 알 수 없는 상황보다 이미 알았던 것으로 돌아가는 게 마음이 편하니 말이다.


    건물이 무너지면 복원할 수 있다(테세우스의 배 문제는 차치하고). 똑같이 생겨먹은 걸 지을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신라 시대에 불타 없어졌다는 절도 다시 복원할 수 있을 거다. 다리가 부러진 산업 잠수부 피규어에 접착제만 붙이면 원래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유형의 무언가는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고 다치고 없어졌을 때 마음이 부서졌을 때 유형의 무언가가 붕괴되었단 사실을 아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복원할 수 있을까.


  영화 <피닉스(2014)>에서 빈터 부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서 얼굴을 크게 다쳐 돌아 온 넬리에게 얼굴을 재건한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복원이 낫겠지란 말도 덧붙인다. 얼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보아왔던 그대로 다시 재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넬리는 애타하던 남편과의 사랑에서도 복원을 바란다. 남편이 나를 알아보고 언제처럼 다시 사랑해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 사랑은 복원이기보단 재건의 방식으로 흘러간다. 원래의 상태 그대로로 돌아가길 바랄 수록 넬리는 깨져간다. 사랑은 반짝였다가 아주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사라지지 않으려는 고집을 부렸다.



  <헤어질 결심(2021>에서 해준은 스스로가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무너지고 깨어졌다. 서래는 해준이 복원되기를 바란다. 복원되기 위해선 파괴 이후 새로 생긴 것들은 모조리 사라져야 한다. 폭격을 맞은 집에 남은 재라든지 어디서 쪼개져 흘러 온 미사일의 파편이라든지... 그런 걸 죄다 모아서 한데 버려야만 한다. 서래는 자기가 꼭 재나 파편이라도 되는 양 사라진다. 해준은 영영 복원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잉크가 번진 물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부서진 조각을 이어붙이고 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면 실금이 보인다. 운디네가 설명하던 훔볼트 포럼은 복원하려다 재건으로 넘어가버린 희한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복원을 담당하는 부분에는 유달리 색이 다른 조각이 눈에 띈다. 다 파괴되고 얼마 남지 않은 원본 조각이다. 새하얀 새로운 복원 건축물 틈에서 혼자 회바랜 조각이 꼭 갇힌 것처럼 보였다. 붙잡혀서 어디로 떠나지를 못하고 앞으로 쭈욱 과거에만 머무를 수 있게 되어버린 거다. 나는 무너짐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부서진 걸 다 긁어모아 붙이고 재현하기보다는 무너진 무언가를 덩그러니 내버려 둘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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