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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ug 22. 2023

희극을 빚는 눈에 대하여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1940)

 지식인이란 계층이 유효했던 시절이 있긴 했다. 기민한 성질로 여기저기 눈을 흘기고, 시대를 감도는 전운 같은 것을 읽어내며, 미리 탄식하고는 했던 사람들. 지식인은 또다시 거대한 출혈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비가 오기 전이면 쑤셔오는 허리처럼 1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찾아온 공황과 응축된 광기가 먼발치에서 보이기 시작한 것. 그들은 질끈 눈을 감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불행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희극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있지만, 그전엔 강력한 무엇도 조촐하게 만들어 버리는 전락의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절망에서도 희망은 피어나기 마련이라 구석에서 공포를 먹고 자라는 어둑서니는 조롱거리가 되는 순간 힘을 잃고 사라진다. 극장의 어둑함이 아늑하기만 한 까닭은 언젠가 영사기가 켜져 프레임을 쏘아낼 것임을 알기 때문. 영화는 이미 밝음의 힘을 타고났고, 채플린의 영화는 희극喜劇이기 때문에 제곱으로 밝다. <위대한 독재자>는 불행을 껴안은 역사를 예언하기 때문에 비극적이지만 언제까지나 희극으로 남는다. 네모난 콧수염은 코미디언의 인중 아래서만 자라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생긴 왕자와 거지가 서로의 삶을 어쩌다 교환해서 지내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각각의 인물이 선이냐 악이냐를 두고 다양하게 뻗어 나간다. 토매니아의 독재자 힌켈과 유대인 이발사가 ‘우연히’ 닮았음을 강조하면서 시작하는 <위대한 독재자>는 엉터리 독일어만큼이나 엉성한 독재의 꼴과, 무성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온화한 게토의 모습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금발 벽안의 아리안인으로 가득한 세상을 꿈꾸면서 갈색 머리를 모두 숙청하자 하는 독재자의 머리는 검다. 그의 귀에 속삭여대는 내각 장관의 이름은 헤링Herring, 그러니까 고작 청어다. 어린 보이스카우트 대원처럼 훈장을 온몸에 붙이고 다니는 장관이나, 나라 이름이 박테리아인 동맹국의 독재자나… 어리석고 멍청한 장면이 한가득.



 그러다 독재자 힌켈은 세계 정복의 꿈에 부풀어서 커다란 지구본을 풍선처럼 들고 춤을 춘다. 발레처럼 산뜻하고 가볍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바그너의 것.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반유대주의자였던 작곡가. 선율이 흐르면 카메라도 춤추듯이 힌켈을 따르고 천장으로 붕 뜨는 지구본과 함께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쉽게 겁에 질려 움츠러드는 모양새를 보면 얼마나 권력이 허구적이고 같잖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허구적이고 같잖은 권력은 누군가를 싹 쓸어버릴 만큼 강력하리란 예언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게토의 사람들은 어쩌면 힌켈이 걱정한 만큼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전쟁 중에 우연히 나치 장교를 구한 이발소 남자는 돌아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희극에도 절벽은 있다. 독재 무리는 이제 유대인 소탕을 명하고 침탈도 시작된다. 이웃 나라로 몇몇은 도망치지만 시간이 지나자 코앞에 독재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병렬로 시간을 스치던 독재자와 이발사는 왕자와 거지처럼 교차한다.



 시작되는 이발사의 (독재자를 가장해야 하는) 연설. 말은 엉터리지만 아마 죽음-불행-저주-유혈-참사로 가득했을 힌켈의 클로즈업이 떠오른다. 이발사는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 부드럽지만 강인하고 무언가 차 있는 눈이 보인다. 어느 순간 연설은 연기가 아니라 앞서 본 사람의 간언이 된다. 고전이 되기 위해선 시간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 기나긴 연설이 유효하다는 건 애석한 일이다. 


 시력이 좋은 탓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남들보다 빨리 봐 버린 사람들이 있다. 채플린도 아마 그중 한 명.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 실상은 당시에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다. 철저히 기밀로 유지됐고 도시괴담처럼 암암리에 퍼졌다. 채플린은 아마 이럴 것이다, 하고 게토를 그렸다. 그는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만, 정작 너무 적은 것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행복에 살아야 하는데, 서로의 불행에 살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미래를 얘기했다. 비운만 앞둔 것만 같은 시대에도 <위대한 독재자>는 희극으로 만들어졌다. 배우는 몸을 쓰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던 찰리 채플린은 마지막 연설에서 눈으로 얘기했다. 유려한 몸짓은 제쳐 두고 오직 눈으로만. 영사기에서 쏘아지는 빛처럼. 어둑서니를 바라보는 동틀 녘처럼.




이미지 출처 I IMDB, 다음영화

원글 주소 I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9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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