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자> (The Conformist, 1970)
발이 퉁퉁 부어있을 때가 있다. 너무 오래 서 있던 탓이다. 그럴 때면 두 발이 몸 전체를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구나 생각한다. 무엇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피로한 때가 있다. 너무 오래 살아있는 탓일까?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다. 무언가를 알게 모르게 지탱하는 일에는 꽤 많은 힘이 든다. 그걸 깨닫는 순간이면 우리는 무작정 의존하고 싶어진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순응자>에서 자꾸만 ‘비정상’ 궤도에 놓이는 인간이 어떻게 ‘정상’으로 구속되려 하는지를 소묘한다. 책임 없는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 너무나 무거워 자유를 내려놓는 인간을 이야기한다.
<순응자>는 양차 대전 사이에 파시즘 열풍이 불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1937년 무솔리니 정권의 로마에서 마르첼로는 줄리아와 결혼을 예정 중에 있다. 그리고 파시즘 열풍 한가운데에 들어가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기를 시작한다. 주어진 임무는 다름 아닌 은사 콰드리 교수와 그 아내를 살해하라는 것. 신혼여행을 핑계 삼아 마르첼로는 그들이 머무는 파리로 떠난다. 는 것이 영화의 큰 줄기다. 줄기만 보면 첩보 스릴러 같지만 사실은 드라마에 가깝다. 영화는 자꾸 과거로 끌려가고, 관객은 이게 현재인지, 꿈인지, 과거인지를 분간할 도리가 없다. 어쩌면 현재가 허상이고 과거는 망령이며 꿈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르첼로는 비정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정신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젊은 정부를 둔 어머니, 어릴 때의 추행과 동성애적 경험 같은 것들이 그를 계속해서 갉아먹는다. 줄리아가 ‘평범’하기 때문에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중산층 아래 별 고민도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그녀가 그를 정상의 궤도로 올려놓으리라 기대한 듯 보인다. 결혼 전 고해성사를 위해 성당을 찾은 마르첼로는 비정상으로 간주한 과거의 경험을 털어놓지만 해소해내지는 못한다. 종교는 규율에서 어긋남만을 꾸짖고 그를 정상으로 규정해주지 않는다.
이때 마르첼로는 파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의 두려움이 곧 파시즘의 양분이 된다고 했다. 집단과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은 오히려 고립하고 무력해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망친다. 주요한 도피처는 국가다. 국가에 대한 순응. 체계가 주는 거대한 구속이 그들의 버팀대가 된다. 1930년대 파시즘의 부흥은 여기에 근간을 둔다. 개인의 불안과 고독, 외로움 같은 것은 (에리히 프롬의)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는 길에서 버려야 할 것이지만, 늘 진리라는 게 그러하듯 다다르기까지 고비가 많다. 한 개인이 이겨내기엔 발이 퉁퉁 붓는 수준을 넘어 물집이 잡힐 만큼 자유는 무겁다.
<순응자>는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그 자신을 없애가는지를 그린다. 이렇게 볼 때, 자유는 종종 사실 체계라는 거대한 내피 위에 덧씌워진 화려한 외피에 불과하다. 통제할 수 없는 비정상으로부터 도망쳐 마르첼로는 순응으로 도피한다. 화려한 화면은 마르첼로의 고독을 덮는다. 인간은 체계로 완전히 녹아들어 그 일부가 되고 체계는 인간의 고독을 말미암아 자란다. 파시즘 정권이 몰락했을 때, 혁명이 일어났을 때, 언젠가 세상이 바뀌었을 때 마르첼로는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어디서든 체계 안에 결박돼 있기를 소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고요가 스산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미지 출처 I IMDB,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