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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Sep 02. 2023

떠밀리지 않고 수직 혹은 수평으로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2021)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는 말은, 어떤 순간에서는 다시는 칼을 뽑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뭐라도 썰어야만 하는 필연의 내몰림으로 읽히기도 한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눈을 뜬 아침에, 다시는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벼락같은 계시가 내리기도 한다는 것. 볼코노고프 대위에게는 생존의 계시가 내렸고 그래서 여지없이 레닌그라드의 거리로 뛰어들었다. 무딘 줄 알았던 마음이 뾰족하게 날 서고 얼음덩이 같던 영혼은 화드득 타오른다. 푸른 눈을 가진 붉은 병사는 이미 뽑힌 칼, 이제 칼집으로 돌아갈 길은 없다. 



붉은 옷의 병사들이 공을 퉁퉁 튀겨댄다. 공이 천장으로 올라갈 때마다 샹들리에 조명이 힐긋 보인다. 빛이 녹아드는 고풍스러운 건물 안은 병사들과 어딘가 이질적이다. <겨울궁전 습격 이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질적인 것의 반복이다. 아이처럼 웃는 병사들은 사실 위험분자를 잡아들여 심문하는 공포의 엔카베데고, 결백한입에서 결백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내야만 하며, 그들의 타깃이 종종 그들 스스로가 되기도 한다. 타깃을 향한 화살이 코앞에 도착하자 어느 병사는 창문으로 뛰어내린다. 볼코노고프는 그 옆을 스친다. 그리고 그 화살이 점차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자마자 도망친다.


살아 있는 죽은 자나 죽은 듯이 살아 있는 자 둘 다 애달픈 건 마찬가지다. 전자는 원한이 해결되지 않아서 이승을 떠돌고, 후자는 자신의 생사도 확신하지를 못하고 머뭇거린다. 1938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살고 죽음이 아주 얇은 선을 두고 오갔다. 위험(할 것이라 예상되는) 분자는 비밀경찰 엔카베데에 의해서 싹 다 잡아들여졌고, 특별심문으로 뱉어낸 자백으로 즉결 처분당했다. 남은 가족은 위험분자에 함께 손가락질을 하거나 혹은 그 손가락질을 받아내거나, 둘 중 하나였고 그래서 가족-이웃-친구… 그 누구도 의심과 배신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에 이르러 있었다. 



죽고 삶의 경계가 그래도 딱 하나 있다면 수직과 수평이라고 하겠다. 슬라보예 지젝은 <톰과 제리> 시리즈에서 추격전 중 밑이 뚫려 있는 것을 인식하고서야 고양이 톰이 아래로 떨어지는 그 코믹스러운 장면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비로소 떨어진다 “고 해석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살아있는 게 된다. 그 사실을 모를 때까지는 우리는 존속한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서 죽음은 대체로 투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대위는 살아남기 위해서(용서받기 위하여) 앞으로 뛴다. 밑이 벼랑인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살아 있다. 산 채로 수평으로 뜀박질을 이어간다.


볼코노고프 대위가 뛰는 이유는 아래로 뛰어내리기 위해서다. 지젝이 말했듯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 자는 이승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살아 있는 시체로서 돌아오기 때문에, 고문으로 죽어버린 동료는 별안간 단체 매장됐다가 흙을 꿰뚫어 다시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신의 전령인 것처럼 대위에게 용서를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고통 속에 살고 죽을 것이리라 말을 하고 사라진다. 아마 꽤 아꼈던 동료의 죽음이 불러온 죄책의 환영이겠으나 볼코노고프는 딱 하나의 살길을 찾은 듯이 매달린다. 가혹한 심문 후 처형당한 리스트를 들고 나와서는 모든 유가족을 찾아다닌다. 도시를 수평으로 헤집는다. 가서 하는 일은 죽음을 선고하고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이렇게 알려줬으니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은 먹히지 않는다. 용서의 기본은 가해와 피해 사이의 주객전도이기 때문에.



들녘을 활보하는 붉은 병사는 영광의 길로 향한다지만, 살아 있는 시체들이 자꾸만 그들의 발을 붙잡고 늘어진다. 제대로 매장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고만 마는 것이다. 끝에서 볼고노고프 대위가 숨이 겨우 붙어 있는 노파에겐 아무 말도 않고 씻기는데, 숨이 끊기기 직전에 노파의 손은 대위의 이마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온다. 위에서 아래로의 쓰다듬음은 삶에서 죽음으로 내려감과 동반되면서, 대위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용서가 된다. 영혼 없이 부품으로 살아오던 병사는 삶의 끝에서야 영혼을 획득하고 그리고 아래로 뛰 내릴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국가도 상사도 누구의 명령도 아닌 나의 명령으로. 나의 자유의지로. 



이미지 출처 I IMDB, 다음영화

원글 주소 I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9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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