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고고학> (Archaeology of Love, 2022)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멋쩍게 마주 서 있다가 상우의 입에서 툭 던져지는 말.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겠니,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지만 어떤 심정으로 말했는지 잘 알기에 못됐게 답할 수 없다. 지질하게도 못나게 구는 상우는 참 어리숙해서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봄이 올 때마다 <봄날은 간다>를 봤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은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상우의 위협감을, 아파트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는 상우를 모른 체 지나치고 싶은 조바심을, 차문을 긁어버린 상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를. 그 안의 석연치 않은… 말하자면 연애 권력을.
어떻게 우리의 사랑을 낭만적으로 물을 수 있을까.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니?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한없이 음습해진다. 너는 나 이전에 얼마나 사랑했니. <사랑의 고고학> (Archaeology of Love, 2022)은 영실이란 땅을 연애로, 사랑으로 파헤친다. 너의 사랑의 지층을 잘라서 단면을 내보여봐. 이건 누구니, 이건 또 더럽고, 이건 없는 셈치자. 그래 너, 참 자유분방하게 살았구나. 고고학자 영실은 만난지 8시간만에 사랑에 빠진 인식과 8년 간 곤두박질을 친다. 매사가 느리고 차분하고 곱씹는 그녀와 옥죄고 신경질적이고 급한 그는 간장게장과 곶감의 조합이다. 보다가 체할 것 같다.
“고고학의 정의는 같아요. 과거의 유물을 통해서, 사람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
영실은 땅을 파는 사람이다. 발굴 현장에서 그녀는 땅을 아주 얇은 겹을 가진 크레이프 케이크라도 되는 양 한 겹씩 긁어낸다. 그러다 조금 빛깔이 다른 흙이 나올 때, 그러니까 다른 시대에 있던 흔적이 발견됐을 때부터는 그곳에 집중을 기한다. 과거를 한아름 안고 있을 그 무언가가 출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식은 땅을 갈아엎는 사람이다. 과거는 현재와 완전히 단절되어야 한다고 믿는 듯이 군다. 인식은 저 깊이 아래에 있는 지층을 헤집고 땅을 아예 갈아 엎어 오직 자신의 흙으로만 지층을 쌓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땅에 발을 차고 돌을 던지며 못됐게 군다. 흙장난이나 치는 어린 아이같이.
서로의 표현에 따르면, 영실은 자유분방한 사람이고 인식은 유약한 사람이다. 영실은 자유분방함 때문에 되려 옥죄이고, 인식은 유약함 때문에 강하게 연애 권력을 휘어 잡는다. 이성 문제와 관련한 이야기만 나오면 -너는 애가 왜 그러니, -반성하고 있어 같은 대화가 매번 반복된다. 질릴 정도로 반복한다. 미처 프레임에 담기지 않았을 연애의 세월 동안 영실은 지독하게도 파헤쳐진다.
그러나 까먹지 말아야 할 것은 먼 역사의 사람을 파헤친다 하더라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지층의 맨윗부분뿐이라는 점이다. 발굴 현장은 드론으로 하늘 위에서 내려 찍혔다. 이후에 누워있는 영실의 모습도 내려 찍혔다. 우리는 그 사람의 기저가 되어주는 모든 역사를 알 순 없다. 인간은 과거의 총체라지만, 여기의 방점은 총체다. 우리는 과거를 부분부분 알갱이로 뜯어 볼 수는 없다. <봄날은 간다>에서 종이에 손을 베인 은수는 무의식 중에 상우가 예전에 알려줬던 것처럼 하늘로 손을 뻗어 휘적였다. 과거의 유물은 어쩌다 이렇게 툭, 하고 현재의 지층에 튀어나와버리곤 한다.
인식이 만일 은수의 애인이었다면 이 손 뻗기의 행동은 어디서부터 온 건지, 그 사람을 왜 집에 들였는지, 무엇을 했는지를 캐물었을 테다. 남의 과거에 망령처럼 집착하는 남자는 상대를 바닥치게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볼품없게 만든다. 연애가 끝나고도 영실의 마지막 지층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자신의 지층을 새로운 사람으로 덮기엔 두려웠기 때문인지 인식은 계속해서 전 애인이 된 영실에 멀어지지 않는다. 안부를 묻고 가끔은 자고 가라고 부르고. 거부할 수 없이 과거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이 순간을 모호한 관계 정의로나마 회피하려 한다. 영실은 이런 인식을 기다려준다. 땅은 모든 걸 품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긴 호흡만큼이나 영화엔 긴 세월이 담긴다. 무턱대고 “영실 씨는 나한테 지금 트라우마를 주고 있어“라 뱉는 인식은 8년 동안 먹구름을 안긴다. 영실은 햇빛마저 받지 못하고 시들해진다. 먹구름이 지나가고 나서도 한동안은 사랑이란 식물을 제대로 틔우려고 하지 않으려 군다. 좋아한단 말 대신 좋아해도 되냐는 물음을 혼잣말로 외워본다. 허락 구하기. 옛날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인식에는 동의하는 거냐고 묻는다. 의견 확인하기. 정신차려보니 거목이 되어있는 영실을 보며 우리는 어떠한 단단함을 느낀다. 새집에서 단잠에 든 영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단아한 화분 하나를 들고오는 꿈을 꾼다. 미움도 꽃으로 틔웠으면 하는 마음. 꼭 식물처럼, 땅처럼 모든 것을 품어줄 것만 같다.
영실이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눈에서 눈, 정면으로 흙을 마주한 순간엔 영화 내내 지층처럼 깔리어 있던 매미 소리가 잦아 든다. 아마 몇 백년 뒤엔 숲이 될 땅. 땅은 현재의 소리마저 머금는다.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 그걸 다 뒤엎고 다시 쌓아올릴 게 아니라 지금의 땅을 밟고 두 눈을 마주해 새로운 우리의 땅으로 올라가는 일이라는 걸 말하는 것만 같다. 그 땅을 마주한 영실의 미래는 어쨌든 조금 덜 두렵기를, 덜 파괴적이기를 기대하게 된다. (현실은 녹록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의 유물을 하나씩 주워입고 남은 길을 마저 걸어야 하는 숙명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산 연애는 죽은 연애의 유물을 땅에 묻고 그 위에 흙을 올려 새 지층을 쌓아가야만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영실은 시커멓게 오염된 지층을 물려준 과거 연인을 호미로 부수어내지 않는다. 끔찍한 기억을 또 덮어낼 수 있을 때까지, 새살 돋듯 새싹이 자랄 땅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견디어 낸다. 지질하고 지난한 8년의 연애는 그렇게 무덤으로 들어간다. 사랑에도 고고학이 있다면 그건 땅을 파기보단 덮는 일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 출처 I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