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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ug 14. 2023

울타리 바깥은 없다

<토리와 로키타>(Tori et Lokita, 2022)

어떤 사회 문제를 다룬다고 할 때, 영화는 그것을 포착하고 문학은 그것을 유출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대한 현실 앞에선 카메라도 숭고미에 사로잡히듯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몰라 방황한다. 그런데 가끔 뛰어난 영화는 세계의 편린만으로도 스크린 바깥의 현실로 뻗어가는 길을 만들어낸다. <토리와 로키타>는 현실을 유출한다. 



체류증 심사를 받던 로키타는 동생 토리와 어떻게 다시 만났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인다. 진술이 상기해내는 고통인 듯 보이지만, 후엔 진술을 지어내느라 느낀 상상통이었단 게 밝혀진다. 토리와 로키타가 할 수 있는 상상은 고작 이런 것이다. 재회한 남매의 이야기를 빈틈없이 채워내기 위해 이야기를 깁어내는 것. 체류증 인터뷰를 연습해주던 토리는 로키타에 “보육원 정원에 있는 나무가 기억나나요?”라 묻는다. 로키타가 “몰라, 기억 안나”라 하니, “맞아, 보육원엔 정원도 나무도 없었거든.”이라 답한다. 있지도 않은 걸 있었냐 물은 셈이다. 있지도 않은 얘기를 있던 것처럼 지어내야만 하는 둘의 처지와 닮아 있다.


더 나아가 둘은 사회에서 ’있지만 있지 않은‘ 존재다. 제도 바깥으로 밀려난 토리와 로키타는 마약 배달일을 한다. 고향에 있는 가족에 돈을 부치기 위해서다. 중간중간 벨기에 입국을 도운 브로커가 빚을 갚으라며 생활 곳곳에 나타난다. 흔한 식민-피식민, 지배-피지매로 양분된 집단 각각의 연대는 없다. 영화 속 어른은 오로지 각자의 이해관계에만 매몰돼 있으며 같은 고향 출신의 어른들도 남만큼이나 매정하다. 여자아이인 로키타에는 성적 압력도 가해진다. 모든 일은 동의와 선택 아래 이뤄진 듯 보이지만 그 동의와 선택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뒤가 막힌 외나무다리에서는 차마 떨어질 수 없으니 전진할 뿐이다.


영화는 토리와 로키타의 만남을 구멍 사이로 가능하게 한다. 체류증을 얻기 위해 마약 재배 공장의 관리인으로 몇 개월을 지내게 된 로키타는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막혀버린다. 동생 안부가 듣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그러다 토리는 어느 차에 숨어 타고, 건물 환기구를 열고, 건물 안의 또 다른 구멍을 찾아 로키타가 있는 공간으로 향한다. 둘은 곳곳에 널린 틈과 균열 덕에 만날 수 있다. 만남이 애틋하고 또 기특하지만, 결국 토리와 로키타는 사회의 구멍난 그물망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 주변을 부유하는 아동임을 생각하면 지금의 만남도 꽤나 스산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토리와 로키타가 부르는 노래는 잡아먹고 잡아먹히고를 반복하는 가사를 가졌다. 아버지가 시장에서 동전 두 닢 주고 사온 생쥐, 그 생쥐를 잡아먹은 고양이, 고양이를 문 개, 개를 때리는 지팡이... 끝없이 이어지는 직선의 우로보로스 같다. 누구도 해치지 않은 것은 최초의 생쥐뿐이며 이젠 모두 남을 해쳐야만 하는 무한연쇄고리에 놓여버렸다. 시칠리아에서 체류할 때 이 노랠 배웠다는 토리와 로키타는 허술한 세계의 틈과 틈 사이로 흘러다녔다. 마약 재배 공장에 숨어 드다니는 토리를 응징하러 온 남자에 지팡이 같은 것을 휘두르고 깨무는 행위는 이 동요의 복잡미묘함을 떠올리게 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고대 영웅이 걷는 비련의 운명과 같은 길에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저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둘을 추동하고, 그렇게 벼랑 끝으로 몰려난다. 서글픈 것은 우리 시대 비극의 주인공이 더 이상 고귀하고 힘을 가진 영웅이 아니란 점이다. 이제 비극의 주인공은 구조 아래서 어쩌면 기계적으로 자신들의 끝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위에서 아래로의 몰락이 아니라 아래서 더 바닥으로의 하강이다. 우린 비극에서 슬픔의 정화가 아니라 정화되지 않은 슬픔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토리와 로키타>는 잔인하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토리와 로키타가 지금의 구조 밖으로 뛰쳐 나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삶은 영화에 흔히 비유되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이런 막막한 현실을 ‘(비현실로서의) 영화’로 낭만화하지 않는다. 관조자이기보단 균열난 현실을 급박하게 쫓는 관찰자로서 두 인물과 함께한다. 그렇게 손아귀에 다 쥐어지지 않는 모래알 같은 현실을 알알이 유출해내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누수하는 현실의 균열과 틈을 마주한다.




이미지 출처 I 다음영화

원글 주소 I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9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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