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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밀 Feb 27. 2024

임신 5주 차의 일기

결혼식을 마친 지 딱 한 달― 벌써 엄마가 되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건 토요일이었다.




이번 달 생리가 늦어져도 너무 늦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피가 옅게 비치길래 곧 시작하는구나, 생각하고 넘겼던 기억이 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생리가 늦어지기도 한다지. 그러나 12월 중순에 결혼식도 다 끝났고 회사 역시 바쁜 시즌이 지나간 다음이라 무척이나 잔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럼 내 몸이 어디 안 좋은 상태인가? 요즘은 안 하던 운동도 하고 있는데!


생리는 몇 년 전부터 28일 주기를 딱딱 잘 맞춰서 하는 편이라 갑자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남편에게 편의점에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더니 두 개를 사 왔고, 자고 일어나서 테스트를 해보기로 하고 한쪽에 치워뒀지만, 이때까지도 임신일 거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어쨌든 피가 비치긴 했었으니까. 불안해서 테스트했다가 임신 아니라고 나오면 그때 안심해서 생리 시작하는 경우도 있대. 남편에게 말해줬는데 자꾸 어쩌면 우리한테 좋은 소식이 있는 거 아닐까, 하고 설레발을 치는 통에 기대감이 슬쩍 고개를 들긴 하면서도 여전히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대감인지 의구심인지 모를 감정을 품에 안고 잠들었던 다음날 아침.



원래 아침엔 남편이 먼저 준비를 거의 다 끝내고 침실로 들어와 이름을 부르면서 깨우면, 내가 일으켜달라고 팔을 쭉 뻗는다.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주는 남편 품에 그대로 폭 안겨서 정신이 들 때까지 배에 얼굴을 대고 비빈다. 등을 가볍게 두들겨 주면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세수를 하러 간다. 화장을 한다. 옷을 입는다. 그동안 남편은 아침을 챙겨 먹는다. 옷을 다 입은 내가 두 사람분의 커피를 내리고, 남편은 설거지를 하고 출근 준비를 마무리한다. 로봇청소기를 켜놓고 사이좋게 집을 나선다.


이날은 남편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소리에 나도 잠에서 깼다. 꿈에서 임신 테스트를 했는데 두 줄이 나온 꿈을 꾸고 깬 참이었다. 그래, 하자, 해! 테스트 결과가 나오면 확실히 알겠지.





그리고 바로 두 줄이 선명하게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거실로 뛰쳐나가 출근 준비 중인 남편을 소리쳐 불렀다가, 영문을 몰라 깜짝 놀란 남편에게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 스탠드를 켜고 앉았다.








남편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우다다 뛰어나가 테스트기를 보여줬다. 전날 두 줄이 뭘 의미하는지 들은 바 있는 남편은 금방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차린 것 같았으나, 그걸 눈앞의 테스트기와 연관 짓는 과정에서 과부하가 일어난 것처럼 잠시 멈칫.



- 그러니까 지금 이게, 아니, 잠깐만, 진짜라고? 진짜야? 진짜?!

- 그렇다니까아!




아침부터 아래층 사시는 분들께 죄송하게도, 남편과 냅다 끌어안고 방방 뛰며 기쁨을 만끽했다. 신혼은 물론 즐겨야 한다는 걸 알지 우린 어차피 아이만큼은 최대한 빨리 갖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고(둘 다 결혼 준비할 때 이미 아기의 이름을 미리 지어둘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보건소에 가서 산전검사받고 엽산 영양제도 타와서 한 3개월 먹으며 준비해 보자고 했던 참에 날아든 낭보였기 때문에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는 곳이 신혼부부 많은 운정 신도시이다 보니 산부인과 잘 된 병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 병원에 가서 확실하게 확인해 보자 싶어, 바로 회사에 잠시 병원 좀 들렀다 출근하겠다고 알린 뒤 바로 준비해 집을 나섰다. 마스크를 허둥지둥 사서 쓴 뒤 얼른 산부인과 병동으로 올라가 접수를 해놓고, 혈압과 체중까지 재고 나서 기다리는데 남편도 나도 잔뜩 긴장한 상태로 얼어 있었다. 테스트기 오류가 그렇게 많다는데, 하필 내가 한 테스트기도 잘못되어 있던 건 아니겠지? 이랬는데 임신이 아니면 어쩌지? 그치만 그렇게 선명한 두 줄이 있을 수 있나? 인터넷 서치해 보니 초기엔 두 줄이 희미하게 떠서 거의 매직아이라도 해야 할 수준이라던데, 내 테스트기는 진짜 자로 대고 그은 듯이 선명했잖아. 그리고 내가 최근에 겪은 증상들, 그러니까 생리가 멎는 것부터 아침이면 울렁거리고 살이 찌고 가슴이 커진 것까지 다 임신 초기 증상과 맞아떨어지긴 해. 그럼 피가 비친 건 착상혈이었나? 세상에, 나 진짜 임신인가 봐!




35세 이상은 노산이라는데, 나는 90년생이라 올해 딱 34세다. 사실 작년에도 34세였지만 윤석열 정부가 만 나이를 통일하면서 만 나이 사회적 통일 정책을 펴면서 연 나이로는 34세, 만 나이로는 33세가 된 것. 어쨌든 남편도 84년생이니 우리 둘 다 마냥 안심할 수 있는 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위해 블로그 포스팅 서치로 시험관 시술에 대한 글이나 난임 기록 같은 것들을 가끔 찾아 읽어두는 편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연 임신이 되었고, 그것도 (이미 9월부터 함께 살긴 했어도) 결혼식 올린 지 딱 한 달 만에 기적처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냉큼 믿어질 리가 없지.













긴장으로 두 손을 꼭 잡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이 왔다.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떠서 왔다고 말씀드리고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말씀드렸더니, 의사 선생님은 그럼 대략 5주 정도 되었겠다고 바로 알려주셨다.



- 일단 초음파를 한번 볼까요? 그런데 5주면 조금 일러서 아직 아기집이 안 보일 수도 있어요.




5주 차엔 복부 초음파가 아닌 질 초음파로 아기집을 봐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하의를 벗고 비치된 치마로 갈아입은 뒤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천장에 붙은 모니터를 보고 있으니 어두운 배경에 까만 원이 보였다. 점도 아닌 원이! 의사 선생님도 이 시기엔 안 보이기 쉬운 아기집이 무려 1cm로 크게 만들어져 있다고, 아기가 자리를 잘 잡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자궁도 아주 깨끗하고 상태가 좋다고 하셔서 안심, 또 안심.


어느새 들어온 남편도 모니터를 올려다보는데, 눈두덩이가 발갛게 물들어 있네. 의자에 앉은 채로 손을 쭉 뻗었더니 단단하게 맞잡아주었다.










아기집 초음파 사진을 출력해 주셨다. 잘 보관해야 하니 아예 아기 관련한 박스를 만들어두는 것도 좋겠네.



영양 상담을 통해 필요한 영양제를 구매하고, 산전검사를 진행하기 위해 바로 옆에 위치한 운정 보건소로 이동했다. 아이맘공간이라는 사무실로 들어가 신분증과 병원에서 발급받은 임신확인서를 제출하니 임산부 배지와 엽산, 철분제와 파주시 공영주차장의 주차비가 50% 할인되는 임산부용 주차증(내가 함께 타고 있을 때만 할인된다고 한다), 다양한 안내서, 그리고 아기 내복까지 바리바리 챙긴 쇼핑백을 내주셨다.


그리고 임상병리실로 이동해 소변검사와 채혈로 산전검사도 끝!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한다. 이게 뭐라고 떨리는 걸까.








2023년은 청룡의 해라, 이 시기 아기들은 청룡의 이미지를 담은 태명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청룡이, 띠용이('용띠'를 거꾸로 한다고) 같은 것들도 많던데 청룡 이미지를 담으면 왠지 아들이 연상되는 것 같아서 최대한 중성적이면서 된소리나 거센소리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혼식 끝나자마자 바로 찾아온 걸 보니 이 아기도 엄마인 나를 닮아서 성격이 급한 것 같아. 아기의 태명은 열 달 동안 차근차근 준비해서 건강하게 나오라는 뜻이 담긴 '차차'가 어떨까, 했더니 남편은 예전에 사랑하며 키웠던 강아지 '차돌이'가 생각나서 좋다고 했다. 강아지 이름이 떠오른다고는 했어도 어쨌든 남편이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그렇게 우리 아기는 차차가 되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이 옛날 만화영화인 〈빨간 망토 차차〉를 떠올리기 때문에 중성적인 이름 짓기에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믿음, 소망, 사랑!






보건소에서 나와 차에 타자마자 우리 부모님, 시부모님, 우리 할머니에게 순서대로 전화해 임신 소식을 알렸다. 보통은 초음파에서 아기집이 확실히 보이는 6주 이후에 알리는 경우가 많다는데, 우리는 어차피 아기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오는 길이니 굳이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 되겠다고 하니 정말 깜짝 놀라서 감격이 뚝뚝 떨어지는 (그 와중에 엄마는 셋을 낳을 때까지 계속 힘내라고 했다) 목소리였고, 어머님과 아버님은 이미 큰 손주가 있으셔서인지 크게 놀라거나 감격하시기보다는 순수하게 기뻐하시는 쪽에 가까웠다.


할머니한테도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병원 가시는 날인지 고모가 함께 있었고, 고모도 소식을 듣자마자 연신 축하를 쏟아냈다. 이어서 할머니를 바꿔달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할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엄마 아빠한테 말할 때도 안 났던 눈물이 삐죽삐죽 나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결국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소식을 전해드렸다. 에구, 애틋하고 귀여운 우리 할머니. 계속 건강하세요, 올가을에 증손주 안아 보셔야지.


오전 반차까지는 안 써도 되겠다 싶어, 2시간만 외출 쓴 것으로 하고 둘 다 회사에 복귀했다. 팀장님께 살짝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며 축하해 주셔서 민망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오후가 되자마자 회사에 단축근무 신청 결재도 올렸다. 임신 기간 동안 알게 되는 좋은 제도나 꿀팁들도 이 임신 일기에 같이 기록해 나가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네. 차근차근 찾아봐야지.


내가 신청한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는 임신 후 12주까지, 또는 36주 이후까지 1일 2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가능하게 하며, 「근로기준법」 제74조 제7항에 의해 보장받고 있다.





단축근무로 남편보다 2시간 일찍 퇴근해야 해서 따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하지만, 4시에 퇴근하면 버스 안에 자리도 좀 있을 것 같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남편도 최근에 꿨던 꿈 중 태몽이랄 게 딱히 없었다. 나야 매일 시시한 꿈을 꾸고, 남편은 자고 일어나면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더 태몽을 특정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엄마도 아빠도 태몽을 꾼 게 없었고, 시부모님도 따로 태몽을 꾸신 건 없다고 하셨다.


그러던 중 남동생이 앗, 혹시 내가 꾼 게 누나네 태몽인가, 하고 입을 열었다. 여동생이 작문 시간 아니라며 말을 막으니 잔뜩 억울해하는 말투로 카카오톡 지난 대화 기록까지 가져와 증빙 자료 삼아 보여주며 해준 이야기. 몇 주 전쯤 출장 갔을 때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하얀 들판에 연꽃 하나가 있어서 안았다는 거였다. 듣자마자 이건 태몽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연꽃이라니! 샛노란 참외의 태몽으로 태어난 사람이 보기에 연꽃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었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부랴부랴 동생에게 꿈값을 보내고 태몽을 샀다. 그나저나 연꽃이면 여자아이일까? 우리 부부를 포함해 주변의 그 누구도 태몽을 꾼 사람이 없다는 점에 의아해하시던 어머님께도 남동생이 태몽을 꿨던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곧바로 공주님 나오시려나, 말씀하셨다. 꽃 꿈이라 딸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어머님은 공주도 좋고 왕자도 좋다고 하셔서 사실 저도 다 좋다고 했다.



늘 아이는 무조건 한 명만 낳고 그 한 명은 꼭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나였다. 내가 둘을 낳는다면 첫째가 아들인 경우의 수뿐이야, 나는 애들 많이 낳아놓고 큰딸은 '살림 밑천' 같은 말 하면서 이상한 책임감 지우는 거 제일 싫어, 남편에게도 그렇게 단호한 입장을 전달해 두었다.


그런데 초음파를 보는 순간, 아기집 속에 콕 박혀 있는 저 흰색 점이 내 아기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 흰 점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워져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누워있기가 어려워졌다. 의자 손잡이를 세게 꼭 쥐면서 앞으로 남은 평생 동안 얘를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 빙 돌아 헤매지 않고 곧장 우리에게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기특한 천사인데 감히 딸이니 아들이니 하는 선호도를 입에 담고 있었다니. 내가 주제넘었어.


결혼 소식을 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임신 소식을 알린다는 게 민망해 가까운 사람들 몇몇에게 알리다 결국 인스타 스토리에 냅다 초음파 사진을 걸었다. 무려 1,256명이 소식을 확인했고 축하 인사와 함께 제일 많았던 건 어쩜 이렇게 연애도 결혼도 임신도 속전속결이냐는 놀림, 바로 아이가 찾아온 걸 보니 남편과 내가 정말 천생연분임에 틀림없다는 덕담. 이 천생연분에 우리 차차도 끼워줄 테니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무럭무럭 크다가 냉큼 합류해!











그리고 저녁부터 시작된 입덧.


책장을 넘기다 종이에 베인 직후엔 그저 살짝 따끔한 정도에 불과했던 상처인데, 연고를 바르려다 살이 벌어진 걸 보고 나면 괜히 더 아프게 느껴지고,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단순히 베인 게 아니라 거의 잘리기 직전인 것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입덧도 이런 건가. 임신 사실을 알기 전엔 이따금씩 속이 울렁거리고 메슥거리긴 했어도 금방 지나갔는데, 이제는 이 울렁거림이 도통 멈추질 않는다. 물을 먹어도 물 냄새가 싫고 회사 구내식당 식단표는 보기만 해도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계란국? 으으. 새송이굴소스볶음? 으으으! 심지어 톳두부무침에 이르러서는 몇 주 전쯤 전복 손질할 때 딸려 나온 톳을 보고 벌레인 줄 알고 식겁했던 기억까지 떠올라 목구멍까지 쓴 물이 치솟는 바람에 자리에 앉은 채로 토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저녁도 거의 먹는 둥 마는 둥, 잠을 자면 좀 나아질 거라 믿고 따끈하게 온수 매트를 켜놓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히려 잠드는 순간부터 본격적인 입덧 축제의 막이 오르리라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지. 자는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이 아니네. 그러고 보니 20대 초중반에 술 많이 마시고 곯아떨어졌을 때 숙취에 시달리는 느낌이 딱 이랬던 것 같은데.


그리고 계속되는 입덧. 구역질과 구토가 안 좋다고 해서 무작정 꾹 참고 호흡만 가다듬기로 한다. 입덧 약도 있다지만 효과가 일시적이기도 하고, 가능하면 약을 안 쓰고 싶어서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밥 먹을 생각만 해도 곧장 울렁거리는 건 좀 너무해. 입덧은 엄마를 닮는다는데 우리 엄마도 입덧이 꽤 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엄마랑 통화하다 그래도 12주 정도 지나면 괜찮아진대, 했더니 의아해하면서, 난 더 갔던 거 같은데, 하길래 희망의 빛이 푹 꺼졌다. 달콤(딸기나 샤인 머스캣이 잘 먹히고 귤은 그냥 그렇다) 시큼(본죽에서 죽 시켰을 때 같이 받은 동치미 국물이 어찌나 맛있던지!) 매콤(팀장님이 짬뽕 사주셨는데 순식간에 국물을 반이나 들이켰다)한 맛이 그나마 좀 받는다고 했더니 엄마가 내 새끼 짠하다며 입에 맞는 거 돈 아끼지 말고 사 먹으라고 용돈을 보내줬다. 오, 이걸로 임산부용 바지 사야지. 5주 차에는 배가 나올 리 없건만 버클 닿는 부분이 자꾸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나마 과일은 꽤 잘 먹는 걸 본 남편이 매일 샤인 머스캣과 딸기를 씻고 손질해 두었다가 도시락을 챙겨준다. 내가 힘들어하는데 보기만 하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힘들다고. 동글동글한 샤인 머스캣을 한 알씩 입에 넣고 깨물면서 느끼는 감사와 사랑. 딸기를 줄 땐 잎꼭지까지 일일이 다 따서 예쁜 접시에 담아준다.


입덧에 이어 배도 콕콕 당기길래 늘 하던 대로 파쉬 보온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받아 찜질을 해주려다가, 문득 이렇게 해도 괜찮은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수가 데워질 수 있고 태아는 단백질이니 절대 하지 말라는 의견과 양수가 데워지려면 산모 배에 화상이 남을 정도로 뜨거운 물이어야 하니 찜질 정도는 상관없다는 의견이 팽팽했다. 5주 차엔 양수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찝찝하니 이제 찜질도 안 해야지. 사무실의 냉기는 옷을 좀 더 껴입는 것으로 대비해야겠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나 이런 거 했는데 괜찮나, 나 이거 해버렸는데 아기한테 영향 없을까, 같은 것들이 많아져서 자꾸 이리저리 서치를 해보게 된다. 술과 담배만 빼놓고는 다 괜찮다는 이야기도 안심이 되고 임신인 줄 몰랐을 때 한 행동들은 아기가 눈감아준다는 글도 귀여웠지만 가장 좋은 건 한 줄의 문장이었다.




아기는 생각보다 강하다.


스스로는 체온 조절조차 못하는 작은 생명체니 아무렇게나 막 대하는 건 당연히 안 되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기는 더 튼튼하고 외부에서 오는 충격도 잘 버텨주기 때문에,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받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기의 성장에는 부정적인 생각과 스트레스가 더 나쁘다는 말을 함께 마음에 새기고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기로 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구별해야겠지. 무사히 출산하기까지 조심해야 할 건 뭐가 있을지 미리 좀 알아두기 위해 검색하던 중, 나보다  노산이라 우려가 많았던 어느 산모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보고 접속한 사이트(https://datayze.com/miscarriage-chart?mode=graph).




산모의 나이, 출산 및 유산 경험, 신장과 체중을 입력하면 주수에 따른 출산 확률을 보여준다. 원래는 유산 확률을 체크하도록 만들어졌다지만 '컵에 물이 반밖에 없는 것'과 '컵에 물이 반이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므로, 나는 일부러 'Probability of Not Miscarrying(유산하지 않을 확률)' 탭의 그래프를 확인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긍정적으로!







이 그래프에 따르면, 5주 6일 차인 지금 내 출산 확률은 86.4%나 된다. 딱히 사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좀 더 마음을 놓았다.











임신 소식을 알리고 난 주의 금요일, 엄마가 차차가 온 걸 기념해 주위 사람들에게 돌릴 떡을 맞췄으니 시부모님도 한 박스 갖다 드리라고 해서 본가에 갔다가 예쁜 꽃다발을 받았다. 이상한 타이밍이지만 꽃을 받아 드는 순간 시간을 확 거슬러 올라가 내가 첫 월경을 겪었을 때 꽃다발을 받았던 게 떠올라버렸지. 우리 집에선 축하할 일이 생기면 꽃다발을 꼭 준다.



매콤한 게 좀 당긴다고 했더니 엄마가 쭈꾸미 볶음을 포장해 왔는데, 쭈꾸미보다도 미역냉국이랑 양념에 볶은 밥이 술술 잘 들어갔다. 두 그릇이나 먹어본 건 오랜만이네.








집에 오는 길, 신혼집에는 아직 화병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소에 들러 깔끔한 유리 화병을 샀다. 오자마자 내 마음대로 꽃대 잘라가며 꽃꽂이. 예쁜 꽃을 집에 오래 두고 보려면 물도 매일 갈아주고 얼음도 넣어주는 게 좋다고 하니 그렇게 해봐야겠어.













본가에 다녀온 저녁부터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보냈는데, 그런 나를 돌본다고 남편은 내내 과일 안 먹고 싶어? 딸기 줄까? 샤인 머스캣 줄까? 마실 건 안 필요해? 하며 부지런히 방과 부엌을 오갔다.


















그리고 토요일에 또 만난 차차. 병원에서 임신·출산 진료비 지급 신청서를 주면서 임신 확인서라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단축근무 신청할 때 첨부해 올렸는데, 회사에선 진단서 양식의 서류가 필요하다고 해서 다시 병원에 다녀오게 되었다. 번거롭지만 차차를 보고 올 수 있었으니 좋았어. 그새 많이 커진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은 아직도 심장소리를 듣기엔 작다고 하셨다. 난황이 어떤 건지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오후 수술 준비 때문에 바쁘셨는지 월요일보다 질문하기가 어려운 분위기라 그냥 나옴.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엔 문득 상큼한 게 마시고 싶어 레모네이드를 사러 갔다. 사과잼 와플도 샀는데 한 조각밖에 못 먹었어.




입덧이 왔을 때 한번 토하면 계속 토하게 된다고 해서 최대한 참아봤는데, 결국 주말에 못 참고 토해버림. 토한다고는 해도 먹었던 음식물이 다시 나온 건 아니고 투명한 물만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토덧. 결국 주말 내내 밥은 딱 두 끼(누룽지를 서너 숟가락씩 먹었으니 합쳐봐야 한 끼 식사도 안 될 테다) 먹고 과일과 사탕, 주스만 엄청 마셨다. 임신성 당뇨를 조심해야 한다는데 지금은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네.


가만히 있어도 울렁거리고, 잤다 깨도 울렁거리고, 뭘 먹어도 울렁거리고, 뭘 안 먹어도 울렁거리고, 음식 생각만 해도 울렁거리고, 하여튼 쉴 새 없이 울렁거리니 결국 토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또 너무 힘든 거다. 배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토하기 싫어서 울다가 토하고 울다가 하니 옆에서 보는 남편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결국 일요일 아침에 본가에서 가져온 떡 드리러 시댁 갔다가 우린 둘째 안 가질 거라고 선언 아닌 선언까지 하고 온 모양. 그래, 우리 차차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자! 나 이거 두 번은 못 해.





5주 차부터 이렇게나 심하게 입덧을 시작하다니, 앞으로 남은 날들이 무섭고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입덧은 아기가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신호라고도 하니까 어떻게든 버텨봐야지. 이제 나는 엄만데, 안 버티면 어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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