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전북 무주 / 충북 영동 민주지산 석기봉
"신불사요? 거기 절이 땅이 엄청 넓어요. 그 땅을 시인이니 예술가니, 아니면 수도하는 사람들한테 무상으로 빌려줘서 집 짓고 살게 했거든. 근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 이사를 나가려고 보니까 아무것도 팔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요즘 어떻게 됐나 모르겠네."
무주 터미널에서 내북마을 신불사로 택시를 타고 가는 길, 기사님의 말이다.
오가는 차 없는 조용한 산촌 도로가 한동안 계속되더니, 마을 입구에서 좌회전하자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좁은 도로가 계곡 상류까지 2km 넘게 이어진다. 계곡 끝에 절과 몇몇 민가들이 있는데 산골도 그런 산골이 없다. 궁금해서 지도로 찍어보니 가장 가까운 가게까지 8km 정도. 이런 데 살면 배달음식도 못 시켜먹고 좀 건강해지려나? 대단한 결심이나 사연이 아니고선 여기까지 와서 집 짓고 살자고 결정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등산로 초입까지 버스 진입이 불가능하니 당연히 등산객도 거의 없다. 보통 민주지산을 가는 사람들은 도로 주차장 식당 등등이 잘 정비된 산 반대쪽 물한계곡에서 시작한다. 내가 이 외진 골짜기를 들머리로 잡은 이유는 오늘의 목표 석기봉까지 가장 짧은 코스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집에서 일찍 출발이 불가능했었다.
"어휴, 산에서 혼자 있으면 안 무서워요? 우린 밤에 산길 운전만 해도 엄청 무섭던데."
걱정과 함께 택시 기사님이 차를 돌려 떠나가자 매미 소리 요란한 압도적 초록색 무더위에 나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속세에서 산골로, 중간 단계 없이 순간 이동을 한 느낌이다.
거미줄 쳐진 쉼터(?)에서 짐을 정리하는데 택시 기사가 남긴 질문이 괜히 자꾸 생각난다. 나는 지금 무서운가? 무언가 조여오는 듯한 이 불편한 마음은 무엇이지?
음. 대낮이라 그런지 몰라도 무섭진 않다. 다만 긴장은 좀 되는 것 같다. 좁고 답답한 계곡길인거 같은데 길이 희미해서 헤맬 수도 있고, 날벌레나 가시덤불이 많을 수도 있고, 비가 쏟아져 고생할 수도 있고, 올라가는 길이 의외로 너무 힘들 수도 있고, 멧돼지를 만날 수도 있고....
매번 이렇게 긴장할 거면서 왜 자꾸 산에 오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올라가보니 길은 너무너무 쉬웠다. 일설에 의하면 이 길이 과거 신라와 백제를 넘나드는 통로였다고 한다. 정식으로 국경을 넘나들기 어려운 사람들이 백두대간을 동서로 넘어다니는, 이를테면 밀입국 경로였다는 거다.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그럴 만도 한 게 석기봉이 있는 주능선까지 엄청 짧다. 박배낭을 메고도 두 시간 반 정도면 되었다.
석기봉(1242m) 바로 아래에 삼두마애불이라고 머리가 셋 있는 부처님 조각이 있는데, 불상 밑단에 수량 풍부한 샘물이 있어 미리부터 힘들게 물을 잔뜩 지고 올라갈 필요도 없다.
그 이전 해발 950m 지점에도 약간 뜬금없는 샘터가 하나 있었다. 불상이 고려 아니면 백제 때 만들어졌다는데, 곳곳에 물이 있으니 옛날 사람들도 이 길을 편하게 넘어다녔을 것이다.
올라가는 길에 조금 비를 맞았다.
사실 비 예보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갈까 굉장히 망설였다. 하지만 살짝 비가 지나간 하늘이 더 예쁘기도 하고, 산을 다닌다는 사람이 비 조금 오는 것을 피해 다닌대서야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설사 흐리고 조망 없는 날이라도 그런 날의 운치조차 담아낼 수 있는 사진 실력을 키워보고도 싶었다.
석기봉에 도착하니 하늘이 파랗게 개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뭐 아무것도 안 보여도 상관없다 어쩌고 하지만 그래도 파랗게 비갠 하늘이 최고다. 옷이 젖어서 찜찜해도 비를 맞을 가치가 있었다.
늘 그렇다. 정상에 오르면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산 밑에 서면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긴장이 되고 올라가서야 풀린다.
그런데 왜 매주 이 짓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그 긴장감을 즐기러 산에 다니는 것일까? 설마?
오후 5시 정도, 꽤 늦은 시간에 등산객 두 명이 삼도봉 방면에서 올라왔다. 민주지산을 거쳐서 내려가신다는데 시간이 모자라 보인다. 그래도 석기봉 앞에서 즐겁게 포즈를 취하고 인증 사진을 찍으신다. 한 명이 정상 표지석 옆에 가서 한쪽 다리를 돌 위에 올리고 포즈를 잡자 다른 친구가 자세를 코치한다. "야, 그렇게 말고, 다리 더 벌려! 다리를 더 옆으로 쫙 벌리고, 남성을 강조해 보란 말이야!"
남자들이 왜 산에만 가면 다리를 쫙쫙 벌리고 사진을 찍나 항상 궁금했었는데 그런 이유인가보다.
비가 지나간 하늘이 변화무쌍하다. 햇살이 조금씩 약해지더니,
석양이 찾아왔다.
출발할 때와는 정반대로, 이 긴긴 밤을 뭘 하며 보내야 심심하지 않나 걱정하며 저녁을 먹고 텐트로 들어갔다.
음력으로 나흗날. 실가락지 같은 초승달이 뜨더니 그마저 오후 9시반 경에 져 버렸다. 별사진을 찍을 절호의 기회. 하지만 밤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버렸다.
저 아래 물한리가 그렇게 큰 행락 단지인지 미처 몰랐다. 불빛도 엄청나게 밝았고 토요일 밤을 맞아 쿵짝쿵짝 노래방 소리가 산꼭대기까지 들려왔다. 나는 기를 쓰고 산을 기어오르고, 저 사람은 울부짖으며 노래를 토해낸다. 어쩌면 이유는 서로 비슷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까의 심심산골 오지 계곡을 올라오며 상상했던 그 분위기는 아니었다.
텐트 안에서 꼼지락거리다가 설핏 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떴다. 주변이 조용했다. 시계를 보니 자정. 더워서 텐트를 다 닫지 않고 방충망만 닫아 두었는데, 혹시라도 별이 보이나 싶어서 고개를 꺾어 밖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다. 어두운 것과는 다르다.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신기해서 밖으로 나갔다. 달도 별도 없는 깜깜한 밤, 산봉우리가 온통 운무에 휩싸여 허얬다. 시커멓고 껌껌한데 허옇다고 하면 말이 되는지 몰라도, 시계는 불과 15미터 정도? 텐트 바로 옆 정상 표지석만 보일 뿐 그 뒤는 그냥 어두운 평면이었다. 불꺼진 극장 스크린 같다고 할까. 어두운 산도, 별도, 밤하늘도, 밤하늘의 구름도, 마을의 불빛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 공포 영화에 나오는 무슨 묘비 같기도 하고. 저 뒤에서 무언가 손톱을 세우고 으히히 하며 나오면 어울릴 것도 같고.
그런데 이상하게 공포심이 들지를 않는 거다. 그래서 한참을 밖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니 이게 산꼭대기인지 어딘지 알 수가 없고, 공간의 깊이감이 없으니 2차원 세상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짐 캐리가 보트를 타고 고생 끝에 도달한 세상의 끝. 하늘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스크린이었음을 발견하고 벽을 치며 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저 바위 바로 뒤가 사실은 스크린이고 아까 석양도 전부 다 영상이었는지도 몰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돔형 스튜디오가 정전이 된 거지. 저기에 산이고 별이고 있어야 하는데. 정전이라서 바람도 없이 세상이 멈춘 듯 조용하기만 한 것이고.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어느 순간 머리 위 구름이 걷히며 하늘이 열렸다. 옆쪽 사방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구름의 띠. 그 구름이 속세의 빛 공해를 다 차단해주어 그믐에 가까운 밤하늘이 그대로 머리 위로 드러났다. 금박 은박 종이꽃가루 같은 수많은 별이 그 안에 반짝였다.
은하수도.
은하수의 화려한 부분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구름이 없었다면 어차피 마을의 불빛 때문에 은하수 자체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을 별빛을 쬐다 다시 텐트로 들어갔다.
그 좋은 기분으로 그냥 잤으면 완벽한데.... 핸드폰 검색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일 일어나서 민주지산 쪽으로 갈까, 삼도봉 쪽으로 갈까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도나 찾아볼 목적으로 구글에 들어가서 "민주지산"을 입력했는데 그만 못볼 것을 보고 말았다. 연관 검색어에 "민주지산 귀신"이 있는 거다.
나도 모르게 클릭을 했다.
검색 결과 페이지에는 각각의 링크에 해당하는 내용이 몇 줄씩 나온다. 슬쩍 읽었는데 "할배가 관을 끌고 돌아다니는 장면을.... 그걸 본 특전사 대원들이 산에서 사망….“ 어쩌고 저쩌고.
민주지산에서는 98년 4월에 특전사가 훈련 중에 조난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행군 중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고, 비가 눈으로 변하더니 체감온도가 영하 이삼십도로 떨어졌다 한다. 결국 훈련을 중단하고 하산하다 6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는데, 산 다니는 사람들은 산악 날씨의 위험성과 관련해서 웬만하면 한두번 들어본 이야기이다. 일반인도 아니고 특수부대 대원들이, 그것도 4월에 저체온증으로 여러 명이 사망했으니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무서워서 차마 링크를 클릭하지 못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저절로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특전사 요원들이 체력이 고갈되고 체온이 떨어져서 헛것이 보이는데, 관을 끌고 돌아다니는 할아버지 환상을 봤고, 결국 그걸 본 몇 명이 사망했고......"
그 단계까지 갔으면 차라리 클릭을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 괴담의 무대가 산이 아니라 군부대 안이었고, 밤에 소복 입은 여자가 관 몇 개를 끌고 쇠사슬 소리를 내며 부대 안을 돌아다녔으며, 그 일이 있은 직후 훈련에 나가서 관 숫자대로 부대원 6명이 죽었다는, 그냥 전형적인 군대 괴담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설프게 읽다 마는 바람에 민주지산 산 속에 할아버지가 관을 끌고 돌아다니고 있다고 상상해 버린 거다. 민주지산에서 혼자 자고 있는데, 민주지산에서 활동하는 귀신 얘기를, 밤 운무에 휩싸여 주변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새벽 1시에, 기습적으로 처음 접한 그 심정이란.....
방충망 너머로 이빨 빠진 할아버지 얼굴이 나타나서 이봐, 나랑 잠깐 얘기나 함세, 이런 불필요한 상상을 하다가 텐트 지퍼를 꼭꼭 다 닫아버렸다. 여름에 듣는 귀신 이야기의 미덕이 있다면 몸이 추워지는 거라던데, 반대로 더워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땀이 나는데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불상 있는 곳에서 야영한 팀이 있었나보다. 새벽 5시 반에 누군가 올라오는 발소리에 잠이 깨었다. 하마터면 쭉 잘 뻔 했는데 다행이다. 밖으로 나가서 새벽부터 핸드폰 사진도 한 장 찍어드리고, 일출 사진도 찍었다.
간밤에 불필요한 상상을 하는 와중에 산행 코스는 민주지산 정상 쪽으로 잡았었다. 내가 하루밤을 지낸 석기봉의 모습을 민주지산에서 감상해 보고 싶었다.
민주지산 주능선은 어제와는 딴판으로, 걷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넉넉한 숲속 산책로였다. 길도 고속도로처럼 잘 닦여 있어서 어제 좁은 계곡을 올라오며 가시덤불에 긁힌 팔의 상처들이 무안할 정도였다.
민주지산 정상석은 너무 거대했다. 나는 이런 거대한 정상석이 참 멋대가리 없고 산의 분위기를 해친다고 생각한다.
민주지산 정상께에서 바라보는 석기봉(가운데 뾰족한 봉우리). 저 멋진 봉우리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왔다고 생각하니 새삼 뿌듯했다.
이 광경을 미리 본 적이 있었다면, 굳이 저 뾰족한 꼭대기까지 할아버지가 무거운 관을 끌고 올라온다고 걱정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귀신도 귀신 활동에 있어서의 효율성과 가성비가 있을테니 말이다.
물한계곡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놀러온 사람들, 가족끼리 여행온 사람들, 대형 버스를 타고 온 산악회 사람들, 조용히 걷는 나이 지긋한 부부들, 옷을 맞춰입고 단체로 다니는 아주머니들, 떠들썩 쾌활한 20대 모임의 남녀들….
주차장까지 내려갔는데 식당마다 예약 손님이 꽉 차서 밥 먹을 데를 찾기도 어려웠다.
민주지산 능선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어제의 남쪽 계곡엔 문명을 피해 오지로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오늘의 북쪽 계곡엔 산에 놀러와서도 밤늦도록 온 산이 울리게 노래방 기계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어제의 남쪽 계곡길은 가시덤불이 길을 막는 오래된 밀입국 경로이고, 오늘의 북쪽 계곡길은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즐거운 얼굴로 분주히 오가는 잘 가꾸어진 넓은 등산로다.
그 양쪽을 굽어보며 민주지산과 석기봉은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탁 트인 민주지산 정상에 앉아 저 뾰족한 석기봉 위로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싶다. 사람 없는 곳을 굳이 찾아다니면서도 쉽게 무서움에 빠져드는 이율배반적인 나는, 그때엔 어느쪽 세상길을 통해 올라야 더 어울리는 건지 모르겠다.
2023. 8. 23.
이 산행의 GPX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