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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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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May 13. 2024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았다

2024년 5월 강원도 인제군 방태산


 DAY 1 : Saturday



"우와, 여기서부터 방태산 정상까지 걸어가시는 거에요? 그 먼 거리를?"

"네 뭐... 오늘 안에 못 가면 중간에 아무데서나 자면 되니까요."


시외버스에서 내려 들른 작은 카페.  배낭을 본 사장님이 목적지를 묻길래 방태산이라고 답했더니 경탄 섞인 눈길을 보낸다. 괜히 좀 우쭐해졌다.


"여기서 방태산까지 길이 이어져 있긴 해요?"

"그렇대요.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한 번 가 보려구요."


실제로 가 보니 방태산까지 이어지는 길은 있었다. 뭐, 그 정도면 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가을부터 쌓인 낙엽과 마른 솔잎이 발 아래 폭신폭신했다. 산길은 등산객을 수줍어하는지 가끔씩 숨었다 다시 나타나곤 했다.  


늦어도 11시면 도착할 줄 알았던 버스는 연휴 첫날 아침의 거대한 차량 정체를 정면으로 관통하여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시간 압박에 점심도 굶고 발길을 재촉하는데, 고도차 400미터 짜리 어마어마한 급경사 오르막에다 쭉쭉 낙엽이 미끄러지는 땅에다....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급하게 서둘러서인지, 오르막길에 계속 미끄러져서인지, 아니면 최근 몇 주 쉬운 산행만 다녀서인지, 허벅지에 근육 경련까지 왔다. 허벅지에 쥐가 나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다. 조금 쉬었다 걸으면 괜찮은데 곧 다시 뻣뻣해져 왔다. 그리고 그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목표였던 방태산 깃대봉은 애당초 글렀으니 지도상 등고선 평평한 저 지점까지만 가서 텐트를 치자. 딱히 조망도 없는 길.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서 어느새 오후 6시 반. 꽤 높아보이는 마지막 봉우리를 다리를 달래가며 쉬엄쉬엄 올라갔다.  조금 가다 쉬고, 조금 가다 쉬고....  이윽고 꼭대기가 가까워졌다. 자 이제 저 턱만 넘어가면 땅이 평평해질 거야!



 


턱을 넘었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해발 1020m 고지의 화원.

 





이것은 무슨 꽃일까?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식물에 무지한 나로선 검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 검색에 따르면 이름은 피나물이고 양귀비과 꽃이란다. 나물이면 먹는 건가? 일단은 그러려니 한다.



석양이 나무 틈으로 햇살을 비추는 꽃밭, 꽃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든데 마침 맨땅이 조금 있어 그곳에 텐트를 펼쳤다.




사방이 꽃천지다. 인적 없는 산길을 더듬으며 걷다가 해가 떨어져가는 일천 미터 능선에서 기습적으로, 충격적으로, 노랑 꽃밭과 마주쳤다.


이렇게 예쁠 수가.


이래서 사람들이 봄을 좋아하는 것이겠지? 그동안 나는 눈 덮인 겨울산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에 사로잡혀 봄을 즐길 생각을 못 했는지도 모른다. 봄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할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처음 산에 압도당했던 순간도 스무 살 10월 초의 설악산, 비현실적 단풍 빛깔을 넋놓고 바라보던 백담계곡의 물안개 가득한 아침이었다. 나는 어쩌면 하얗고 깨끗한 겨울보다 알록달록한 것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의 감격과는 달리, 갑자기 나타난 이 불청객에 고라니는 화가 났다. 깜깜한 밤이 되자 일이십 미터 앞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계속 고함을 쳤다. 그래 허락도 없이 남의 땅에 불쑥 침입한 내가 잘못이지, 고라니가 어서 가기를 조용히 기다리다 너무 시끄러워 (솔직히 말하면 밤에 메아리치는 고라니 울음 소리가 무서워) 결국 텐트 안에서 대응의 고함을 한 마디 질렀다. 고라니는 순간 놀랐는지 조용해졌다가, 곧 또 소리치며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DAY 2 : Sunday



다음날은 어린이날. 예보대로 비가 내렸다.


하루밤을 같이 보낸 꽃들과 안타까운 작별을 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웬걸, 꽃밭은 능선을 따라 1km 가까이 계속 이어진다.




저 꽃길을 지나 구름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었으면 정말 멋졌을 텐데. 이런 의미 없는 아쉬움만 계속 들었다. 삼각대 세우고 셀프 뒷모습 찍을 생각을 그 순간엔 왜 못했는지....





운무 속에서 노루 같은 것이 후다닥 뛰어간다.


꽃길을 보며 가슴이 벅차본 적이 전엔 없는 것 같다. 그래, 모든 것엔 처음이 있기 마련이지.




깃대봉(1435m)이 가까워지는데 이곳엔 진달래가 아직 피어 있다.




차가운 봄비를 머금고.




한니동계곡 하산길. 기대치 않았던 작은 폭포도 만났다.


하늘하늘 말랑말랑해진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와 꽃사진을 주변에 돌리는데 친구 한 명이 그런다. 노랑꽃(피나물?)이 봉오리를 오므리고 있는 걸 보니 아직 만개한 것은 아닌가 보라고.


음? 정말?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무언가 번쩍하며 지나갔다. 다음 주말에 또 가자! 일주일 후엔 만개했을지도 몰라. 이번엔 좀 무겁더라도 카메라 렌즈를 제대로 챙겨가자.


근육통이 온 다리도 열심히 주무르고, 비에 젖은 장비들도 열심히 말리고, 버스 표도 예매했다.




DAY 3 : Saturday



토요일은 금방 돌아왔다. 지난 주와 같은 버스에서 내려, 같은 배낭을 메고, 같은 상의를 입고, 같은 모자를 쓰고, 같은 카페에 또 들어갔다. 사장님이 나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안녕하세요 과거에서 찾아온 시간여행자랍니다, 허튼 장난을 칠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지난 주 둘째날 아침, 꽃들과 이별하며 찍었던 사진이다.


그때 두고 온 꽃들을 만나려고 같은 길을 열심히 걸었다. 이번에 허벅지 쥐는 나지 않았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시간은 비슷하게 5시간쯤 걸렸다.


힘들었던 마지막 봉우리 아래에 왔다. 저 오르막 턱만 넘으면 꽃밭이다. 몇 걸음 오르다 쉬다 하던 지난주와 달리 이번엔 기운차게 성큼성큼 올라갔다. 드디어 봉우리 넘어 평지가 눈앞에 펼쳐지며, 짜잔~





그런데 꽃밭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같은 자리에 텐트를 쳤지만, 이젠 그냥 풀밭이다. 내가 꿈을 꾸었던 것일까?


지난 주 수줍게 오므리고 있던 봉오리들은 만개 직전이 아니라 이미 힘을 잃고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나보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강풍주의보라고 한다. 요란한 돌풍에 실려온 빗방울이 밤새 텐트 벽을 때려댔다. 고라니도 찾아오지 않았다.


허무했다. 사실은 스러져가고 있는데 이제 곧 활짝 피어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때가 우리 삶에 종종 일어나는 것이겠지? 이미 클라이막스가 지나갔음을 까맣게 오해하는 그런 일들이....


걸어서 5시간 걸리는 이 외진 산 속, 비바람에 사정 없이 흔들리는 썰렁한 텐트 안에서 나는 불필요한(?) 솔캠을 하고 있었다.....





DAY 4 : Sunday



노란 꽃밭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회색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래졌다.


새벽까지 비가 오더니 아침이 되자 구름 한 점 없이 개었다.



어쨌든 왔으니까 위로는 올라가보자. 출발 전 기념사진을 찍는데 배낭도 힘을 잃고 자꾸만 쓰러진다.


그래도 높은 곳엔 노란 꽃망울들이 남아 있다. 해발 1200미터, 반가운 녀석들이 보인다.



지난 주 만큼의 생기는 아니어도, 노랑 꽃들이 아직도 버티고 서 있다. 보라 친구들(벌깨덩굴?)이 함께 서 있다.




고개를 떨군 건 아직 어리고 수줍어서가 아니라 그저 힘이 없어서인가 보다. 일주일 사이에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마지막 배웅을 받는 느낌. 물론 나의 착각이다.




지난 주와는 다른 계곡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 갈림길에 걸터앉아 30분을 쉬었다. 내려가기 전, 공들여 눈에 담아 본다. 올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불과 일주일 전 친해진 우리는, 더 좋은 날들을 누릴 것만 같았던 우리는, 힘 없는 모습으로 벌써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다.  




세 시간 반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 계곡길.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햇살이 따스했다.




봄이 가 버려도 물은 변함없이 흘러 내려올 것이다.


꽃밭이 사라짐을 아쉬워하기보단, 잠시나마 설렐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하겠지.


나도 모르게 봄과 사랑에 빠졌고, 일주일만에 작별을 고했다.


내년에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엔 너무 늦기 전에, 새롭고 싱싱한 마음으로 다시 만나자.




(24.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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