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경남 함양 / 전북 장수 백운산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좌초한 인간들.
가 닿을 수 없는 높이를 강인하게 추구하다가
한기(寒氣)를 끌어모아 서리를 뱉어내는 겨울땅에
결국은 드러눕는 인간들.
언젠가 이른 봄 그대들이 찾아낸 새파란 무덤 하나.
그대를 향해 왈칵 달려드는 풀내음
그것이 우리가 끝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이다.
— 산정묘지 19 / 조정권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무덤가에 한참 앉아 있었다. 서걱이는 마른 풀 사이로 조금씩 연두색 물기가 스며들어 오는, 4월 중순의 이른 아침.
아침마다 따스한 햇살을 세상 누구보다 먼저 받을 수 있다면, 지리산까지 물결치는 능선의 파도를 매일같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런데 늘 적막하고 고독해야 한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형벌일까.
오래 전이지만 서점에서 책 제목에 '산'자만 보이면 무조건 사들고 오던 때가 있었다. 해외 등반가들의 수기도, 국내 등산 안내서도, 산을 배경으로 한 이런저런 소설도 있었는데 그 중 한 권이 조정권 시인의 <산정묘지> 연작 시집이었다.
그런데 조정권 시인이 말하는 산이란 눈 내리고 바람 불고 나뭇잎 살랑이는 속세의 산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의 산이어서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엄혹한 세계에서도 고고히 빛나는 높은 정신, 삶과 죽음이나 쾌락과 고통을 뛰어넘는 불멸의 승리, 그 상징이자 공간이 시인의 '산'인 것 같았다.
내가 산을 다녔던 건 정신을 고양하거나 자아를 연마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건강을 증진할 목적도 아니었다. 내겐 등산이 단순히 쾌락을 좇는 행위였다. 술을 마시거나 바닷가를 노닐거나 영화를 보거나 근육을 단련하거나 등등의 다른 많은 행위들보다,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산행에서 느끼는 쾌락의 강도가 더 강했을 뿐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결빙된 극한의 산정에서 묵묵히 그리고 고고히 빛나는 존재라니, 어휴, 생각만 해도 그렇게 되긴 싫었다. 나는 그냥 사바세계에서 별 생각 없이 즐겁게 뒹굴고 싶었다. 육신과 물질이 주는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지 그 유한성과 덧없음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차원으로 승화할 의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시집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었다. 조정권 시인이 그리는 산, 그런 곳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백운산 정상의 무덤에서 갑자기 저 시가 떠올랐던 것일까.
이른 봄의 새파란 무덤에서 "그대를 향해 왈칵 달려드는 풀내음, 그것이 우리가 끝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라니.... 코끝이 살짝 시큰해지는 막연한 이 느낌의 정체가 무엇일까.
두어 달 전, 모르는 사람에게서 쪽지가 왔다. SBS 모닝와이드 방송 작가인데 백화산 주행봉 꼭대기의 무덤에 대한 취재를 하고 있단다. 내가 썼던 브런치 글을 https://brunch.co.kr/@560d8fe33aad457/30 취재 과정에서 보았나보다.
(이후 해당 방송엔 내 사진 두 장이 아주 잠깐 나왔고, 놀랍게도 피디가 무덤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주행봉에 갔을 때만 해도 저기보다 더 경치 좋은 무덤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세계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나보다. 못지 않은 조망을 가진 무덤이 백운산에도 있었다.
백운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전국에 수십 개가 있다. 그 중 가장 높은 백운산이 함양과 장수, 그러니까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솟아 있는 이곳 백운산이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란 곧 백두대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는 덕유산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능선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동네 사람들은 높은 곳에 묘를 많이 썼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능선길에 무덤 여러 기를 보았다. 그 중 위 첫 사진에 나오는 백운산 정상의 무덤이 가장 그럴듯 했는데, 그 전방에 있는 봉우리에서 조망을 새치기(?)하는 고인도 계시다.
조망으로 치면 저 빨간 화살표 지점에 있는 무덤을 능가할 곳이 있을까? 백운산 정상에서 약 600m 떨어진 저 봉우리 양지 바른 꼭대기에도 무덤이 하나 있다.
하루밤 쉬어가기 꽤 괜찮은 자리였는데 넓지 않은 봉우리 위를 무덤 하나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 좋은 곳을 혼자만 쓰다니 치사하다, 라는 생각도 들지만 좋은 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의 넓디 넓은 허공. 그 빈 공간을 마음껏 누리는 대신 그 허공에 몰아치는 찬 바람을 더 많이 맞아야 하겠지. 들이치는 빗방울도 더 많이 견뎌야 하겠지.
가장 높은 곳에선 누구보다 더 빨리 매일의 태양을 맞이하겠지만, 역설적이게도 봄은 가장 늦게 찾아온다. 산정엔 아직 풀이 어리다.
하지만 산 중턱. 땅의 표면에선 이미 봄의 노래가 시작되었고,
산 아래에 내려오자 나무 위까지 하얗고 푸르게 채색되어 있다. 무언가 건설하는지 덤프트럭이 오가고 중장비 소리가 분주하다. 박배낭 멘 사람이 사진 찍고 다니기는 조금 겸연쩍은 일상의 생활이 펼쳐져 있다.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나는 높은 곳을 찾아다니지만 생명은, 삶의 에너지는, 매일의 삶은, 낮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좌초한 인간들.
땅에서 좌초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땅에서 좌초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산 정상에 영원히 머무르기를 택했다.
전날 저녁 석양이 비추던, 백운산 정상의 무덤 두 기는 누군가의 쓸쓸한 뒷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 때문이었을까.
그 때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아마 지금쯤은 백운산 정상까지 봄이 차올랐을 것이다.
산에 오른 이들을 향해 무덤의 풀내음이 왈칵, 달려들 것이다.
(24.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