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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댁 Apr 01. 2022

꽃보다 누나

서툰 인생을 시작하는 순간, 찬란했던 인생을 정리하는 분과 만나다.

 '꽃보다 할배'라는 여행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나 역시 할아버지들의 귀엽고 멋진 여행기에 후속 편을 기다리며 챙겨볼 정도로 좋아했었다. 시간이 가진 힘이란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따뜻하게 전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알 법한 유명한 배우의 시절을 보내신 황혼의 어르신이 툭툭 던져 주시는 이야기들이 내 마음을 퉁퉁 울렸는데, 그런 느낌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던지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여세를 몰아 해당 프로그램이 여행 리얼리티 컨셉의 시리즈물로 제작된다는 뉴스가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속작으로 여배우들의 크로아티아 여행 컨셉의 새 시리즈가 제작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우와, 크로아티아 한국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지겠구나,라고 생각했었더랬다. 그런데 얼마 후에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꽃보다 누나' 촬영팀 코디로 같이 동행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의 나는 돌을 갓 넘긴 둘째와 두 살 터울의 첫째를 돌보느라 허덕이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촬영 코디라니, 촬영도, 코디도 내겐 생소한 말들이라 조심스레 거절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일주일을 따라다녀야 한다니, 우리 아이들은 누가 돌보란 말인가. 거절 의사를 밝히고 전화를 끊었는데, 며칠 후 부탁하셨던 분과 촬영 관계자가 신랑에게까지 전화를 해서 도저히 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냥 함께 동행만 해달라며 부탁을 거듭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현지 코디라는 이름으로 '꽃보다 누나' 촬영팀과 동행하게 되었다.


 연예인과 일한다는 설렘을 잊을 만큼 나는 처음 해 보는 현지 코디 역할에 긴장해 있었다. 다행히도 내 역할은 카메라 촬영팀과 주로 동행하며 그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는 일이어서 별 어려움은 없었다. 모두들 좋은 분들이었고, 그들에겐 낯선 크로아티아가 나에겐 익숙한 곳이어서 일정은 편안하게 흘러갔다. 물론, 많은 밤샘과 기다림 등의 몸고생은 있었지만 갓난쟁이 애 둘을 키우던 삶에 비하면 촬영 일정은 나에게 오히려 휴식에 가까웠다.


얄라치치광장에서 드론 촬영 허가를 받고 띄우던 모습(좌) 두브로브닉성곽 촬영 한다고 뛰어다니고 다들 녹초가 되어 주저앉은 모습(우)


 밤늦은 자그레브 거리에서의 촬영이나, 얄라치치 광장에서 그 당시엔 생소하던 촬영 드론을 날리자 우르르 모여들던 사람들, 두브로브니크 성곽을 뛰어다니느라 혼이 쏙 빠지던 경험 등이 모두 기억에 남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촬영 종료를 앞둔 어느 날 밤 두브로브니크 바다 옆에서 가졌던 회식자리에서의 김자옥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에는 그분이 암으로 투병하시는지 몰랐을 때였다. 한국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전문의도 한 분 동행하셨었는데, 그분이 계신 우리 테이블로 오셔서 두런두런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 밤의 두브로브니크가 생생하다. 아들 둘을 갓 낳아 기르고 있다는 날 보며 많은 말씀을 해주셨었다. 바다 위 선착장에 위치한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었는데, 그날을 떠올리면 우리 테이블 바로 옆에서 불빛을 받아 반짝이던 밤바다와 뺨을 간질이던, 초겨울에도 따듯했던 바람의 촉감들이 다시 느껴지는 듯하다. 생각보다 더 작았던 몸집의 선생님은 화려한 인생을 살아오셨으면서도 내게 인생에 중요한 건 별거 없다며 가족과 현재의 나를 사랑하라며, 그리고 건강을 꼭 챙기라며 손을 꼭 잡아주셨었는데, 그 후에 유명을 달리하셔서인지 몰라도 그때의 그 말씀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분의 기억은 한국으로 돌아가시던 날 공항에서의 작은 배려 덕분에 더더욱 잊히지 않는다. 낯선 나라에서 며칠 같이 여행하며 스쳐 지나쳤을 뿐인데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공항에서 날 찾으시더니 지갑에서 남은 현지 통화인 쿠나를 손에 꼭 쥐어주셨더랬다.

 많지도 않은 170쿠나.

"나는 이제 필요 없으니깐.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필요한 사람이 갖는 게 낫잖아. 집에 애들 뭐라도 사줘요." 하시며 웃으시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둘째 낳고 혼자 아이 둘을 기르면서 주변에 그런 어른이 고파서였었는지,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사이에 굳이 나를 찾아서 그 돈을 쥐어주시던 마음이 따뜻해서였는지 몰라도 그 돈을 한동안 쓸 수가 없었었다.


마지막 저녁 회식 날 레스토랑 옆의 일렁이던 바다와 불빛들


 촬영이 정신없이 몇 조로 나뉘어서 진행되어서 나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에야 그분이 자그레브 대성당에서 기도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걸 알았고, 투병 중이신 것도 그제야 알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의 세계관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단계에 이르러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순간에 다다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깊은 고찰들.


 그때의 나는 갓 서른의 문턱을 넘어선 인생 초보였고, 두 살 터울의 둘째를 낳고 애 둘을 이국 땅에서 키워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때였다. 빡빡하고 예민한 방송국 일의 특성상 힘들고 기분 나쁜 일들도 많았지만, 지금이라면 내가 조금 더 유연하고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아쉬움이 남는 경험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보았을 때 아쉬움이 남지 않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그때 갓 입사해 새끼 피디로 고군분투하던 피디님들이 지금은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을 맡아 잘 지내는 걸 멀리서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든다. 같이 뛰어다니던 피디님들이나 카메라 감독님들 몇몇 분과는 드문드문 연락하며 지내고 있는데, 때론 그때의 어리고 부족한 나를 믿고 크로아티아를 누비던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때로는 완벽하지 못해서 이뤄지는 일들도 있다. 그렇게 탄생한 프로그램이 또한 '꽃보다 누나' 아닌가. 낯선 새로운 곳에서 부족하지만 하루하루 만들어 가는 일정을 담아낸, 그 안에서 서툴지만 작은 행복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꽃보다 누나'의 방영은 이후 한국에서 크로아티아의 위상을 어마어마하게 올려주었다.


 한국과 크로아티아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꽃보다 누나' 프로그램을 빼놓을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도  프로그램은 내게 의미 있는 사건이다. 물론  당시에는 내가 이곳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게 될지도 몰랐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꽃보다 누나' 프로그램의 덕을 보게 되거나 마찬가지이니까.  프로그램 방영 이후 크로아티아를 찾는 한국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한식당을 운영하는 나에게는 분명히 반가운 일이다. 당시에는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운명으로 얽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그분의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여행을 동행하게  것도 어떤 운명이었나 싶을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위태위태했었고, 주변에 그렇게 나이 지긋하신 인생 선배는커녕 커피    친구도 없었을 때였다. 어쩌면  인생이 나에게  선물을 아닐까 하는. 힘든 투병 중에도 소녀처럼 웃으시던, 지나가는 작은 인연에도 따뜻함을 전해 주시던 김자옥 선생님을 만났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모처럼 그때를 추억하며 다시 한번 그분의 평안을 빈다.


김자옥 선생님과 찍은 사진이 아무리 찾아도 없다. 마치 시간이 흐르며 지워지는 기억처럼. 이틀밤을 새고 세수도 못한 채 돌아가는 공항에서 찍은 나영석피디님과의 사진은 남아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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