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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강머리 앤줌마 May 06. 2022

꿈을 따라 길을 나서다

딸~

어제 남강길을 20,000보나 걸었다.

집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어졌는지 몸의 균형이 깨지는 소리가 감지되었다.

몸과 발을 따뜻한 차와 온냉찜질로 달래주며 깨끗하게 씻고는, 몸살약도 미리 먹어주는 센스까지 발휘하며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덕분에 잠에서 깨어나는 몸이 상쾌하다.

이렇게 마음의 평화가 가득찰 때면 한지붕 아래(1층과 5층)에 살고 있는 딸램 생각이 난다.

가지고 내려온 빨래도 햇살에 마른 뽀송한 모습으로 곱게 접혀 바구니에 담긴지가 2~3일은 지났으니 얼굴 본지가 여러날이 된듯하다.

핸드폰을 들고 딸램을 불러본다.

"딸램~"

"어~ 엄마"

"바쁜가 보오. 파서방은....?"

"스벅에 가고 없소~"

"이런날엔 엄마가 운전을 하면 차를 타고 딸램이랑 드라이브하면 좋을텐데.... 미안하오~"

"개그하오. 난 괜찮소~ 이번에 모집한 엄마표영어가 성적이 좋소~ 개강준비 하려면 바쁘오"

열달을 배앓아 낳은 새끼라고 엄마의 마음을 한번에 꿰뚫어 본다.


딸은 허니문 베이비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남편과 알콩달콩 고소한 참기름을 짜며 서로에 대하여 알아가는 시간을 건너뛰고 '엄마'라는 이름표를 먼저 달았다.

유난히 아기를 좋아했다.

동네 아기들과 조카들이 다 내차지였으니 나는 기뻤다.

아기가 원할 때에 언제든지 눈을 맞추며 사랑하리라 생각하니 마음도 행복했다.

그시절의 결혼은 여자는 집을 떠나서 남자의 집에 옮겨 심어지는 개념이 있었고 또 여자는 친정에서는 완전히  분리되고 남자는 결혼전보다 더 부모와 밀착되는 관계(아내가 된 여자를 통하여)가 되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남편의 가족이 아버님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이면 시댁으로 향했다.

통영에서 버스를 타면 진주까지 1시간40분정도 소요되었다.

그시절 통영에서 진주길은 '전설따라 삼천리'로 불릴만큼 꼬불꼬불한 험한 길이었다.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고 후덥지근한 여름날씨에 입덧은 심해져 비닐봉지를 준비하여 버스를 타야만 했다.

남편에게 혼자 다녀오라고도 했지만 아버지를 잃은 남편의 마음이 온통 어머니에게로 쏠려있어서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미 나는 남편과 한몸이 되었고 남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야 했다.

딸램을 낳을때까지 매주 토요일이면 시댁으로 향했다.

아내와 엄마와 며느리의 역할이 똑같은 무게로 동시에 시작이 된 것이다.

어머니와 남편의 형인 아주버님은 한집에 살고 계셨고 동서인 형님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하고 두달이 지날 즈음에 형님은 아기를 낳았고 나는 형님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하여 시댁으로 출발하였다.

임신 8~10주차는 유산이 가장 염려되는 시기였지만 나의 몸을 걱정해주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집안 청소와 기저귀를 빨아서 널고 개고 하는 과정은 나의 몫이었다.

어머니와 형님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내가 오래 머물기를 원하셨고

남편의 가족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나는 당황할 일이 자주 생겼다.

어머니와 아주버님은 형님과의 문제가 생기면 한밤중에도 전화를 하셨고 다음날 아침에 시댁으로 가는 일도 있었다.

딸램을 낳고 통영에서 본격적인 살림이 시작 되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어머니께서 호출하시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했다.

결국 아주버님과 형님은 헤어지셨고 그 가정의 빈 자리를 내가 메꿔야 했다.


딸램이 두돌 무렵에 나도 둘째를 낳았다.

어머니께 가는 횟수가 조금씩 줄어 들었지만 아주버님과 형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의 마음은 더 내게로 기울여 지셨다.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전화를 하셨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처럼 필요한것을 사 드렸다.

아들이 18개월이 될 무렵에 나는 남편보다 6개월 먼저 어머니 옆으로 이사를 왔다.  

아주버님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전화를 하셨고 나는 아이둘을 데리고 큰집으로 출근을 하였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넷에게 하루종일 눈과 귀를 열고서 밤새나온 빨래와 청소를 하고 저녁을 먹은후 설겆이를 끝내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큰조카는 항생제 알레르기가 있어서 감기약이 맞지 않으면 온몸이 굳어버렸다.

나는 아들을 업고 조카를 안고 병원 응급실에서 동동거리기도 하고 조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자서 아이넷과 며칠씩 씨름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당연히 내가 해야할 일로 여겼기에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가장 홀대 받는 것은 딸이었다.

아이들 넷이 어울려 놀다가 누가 하나 울기라도 하면 딸램에게로 원망이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 몸이 고단하니 딸램과 눈을 마주쳐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쌓인 짜증을 딸에게 풀고

아들을 맡기고 집안일을 하거나 졸기도 했다.

엄마와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야 할 시간들을 딸은 잃어버린 것이다.

딸은 그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토요일이 되면 나와 남편은 큰집가는 문제로 다투었다.

그러면 딸은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괜찮아 엄마가 조금 있으면 우리를 부를거야 큰집에 가자고" 그리고 딸은 동생에게 당부한다.  "큰집에 가면 절대로 엄마를 찾으면 안되는거 알지, 엄마에 대한 얘기도 안돼 알았지" 영문도 모르고 겁에 질린 동생에게 부탁을 했단다.

겨우 7살 5살 아기들의 대화다.

딸램도 나처럼 그때부터 어른이 되어버린것이다.

나는 이런 딸의 상처를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틀의 진통 끝에 딸을 낳았다.

열달 내내 나는 딸일것 같았는데 딸이어서 너무 좋았다.

예쁜 이름도 지어주고 머리도 땋아주고 예쁜 원피스를 입혀야지~

나를 잘 아는 친구나 지인들은 내가 딸을 낳았음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자랄수록 영리하여 주변에 부러움도 샀다.

유난히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이 많은 딸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20대의 나이를 하나님께 드린다며 몽골에서 3년 가까이 봉사활동을 했고 탄자니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짧은 봉사들을 했다.

딸은 중국국제학교에서 근무하며 살다가 설명절에 사위랑 잠깐 다니러 왔다가 코로나로 붙잡혀 버렸다.

사위는 자신의 나라 네덜란드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그 이유들을 나열하며 정착할 생각도 하고 있다.

피난살이 같았던 집에도 필요한 물건들로 채워져 제법 사람사는 집이 되었고 행복한 에너지가 많은 딸과 오랜시간 여자와 아내로서의 여인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감사하다.

이 작은 나라에서도 남과 북, 동과 서, 여자와 남자가..... 요즘은 더 작은 단위로 나뉘며 다투고 있다.

찐 화성과 금성에서 온 남자와 여자가 만났으니 다를 수 밖에 없고 다툴 수 밖에 없다.

서로의 삶과 다른 문화를 인정하며 인생을 배워가고 서로가 가진 재능을 연합하여 토닥거리며 도란도란 살아내는 일상의 모습들이 엄마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는 그도 사랑스럽다.

시댁의 무게에 눌려 어린날 배우고 싶은 학습에 도움을 주지 못한것이 늘 마음에 빚진자였으나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가고 있는 딸을 보며 이미 발효된 사랑의 빚은 다 벗어 버렸다.


발렌타인데이라고 금일봉과 마카롱을 들고 내려와 한참이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간 빈자리에 남은 여운이 고소하다.

나는 딸램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랑하며 꿈을 놓치지 않고 꿈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가는 일상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오늘도 딸이 살아가야 할 인생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이 뜨거운 것이 축복임을 알기에 옆에 있을때에 인격적인 배려와 그녀의 삶을 존중하며 사랑하려한다.





#나의에세이 #앤의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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