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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강머리 앤줌마 Apr 30. 2022

꿈을 따라 길을 나서다

결혼 행진곡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따라 마트에 가서 먹고 싶었던 달콤한 쿠키를 손에 넣은 후의 만족감처럼 결혼을 선택한 나의 마음도 그랬다.


1984년 5월 연휴에 만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작은도시에서 남여가 만나는 찻집은 정해져 있었지만 남편의 집 가까운 곳으로 약속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엄마에게서 약속장소를 받아 적고 가장 좋아하는 연분홍 줄무늬 원피스를 골라 입고서 대문을 나서려는데

"그 어른이 살아계셨으면 나하고 사돈되는 것을 좋아라 하셨을낀데....."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툭 말씀하시곤 돌아서셨다.

신록의 계절 5월의 나뭇잎들은 봄꽃보다 더 사랑스러웠고 바람도 부드러웠다.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를 향하여 가는 나의 마음에도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

둔탁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자 희뿌연 공기가 나를 제압했다.

그 시절엔 젊은이들이 모이는 찻집에도 담배 연기로 자욱하던 시절이었으니 어른들이 모이는 다방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먼저 발견하고 손을 들고 부르는 소리가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를 소개하신 분은 남편의 외숙모의 동생이셨고 엄마와도 친분이 있어서 나도 아는 분이셨다.

남편은 어머니랑 함께였다.

먼저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곱고 예쁘셨다.

차를 한잔 나누며 내게 몇마디 물으셨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아가씨랑 좋은 시간 보내라"고 당부를 하시곤 자리를 피해주셨다.


아가씨를 처음보는 맞선자리에 총각은 청바지 청자켓 차림이었고 자세도 비스듬히 어정쩡하게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시는 어머니를 붙잡고 "같이 가요" 하는 총각이 어의가 없었지만 마음을 누르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노력했다.

차를 마신후 다방에서 나온 우리가 간 곳은 전자오락실이다.

내게 50원자리 동전을 쥐어주곤 그는 열심히 오락기를 만지고 있었다.

처음가는 전자오락실도 낯설었지만 그의 행동은 더 난감했으나 하는 행동과 모양새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두어시간 무엇을 했는지 더이상의 기억은 없다.

그날이 우리에게 1일 이었음에도.

집으로 돌아와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고 기대도 없었다.

맞선을 본 2주동안 그는 잠수를 타는지 고요했다.


남편을 만나기전에 나는 엄마의 성화로 만난 남자가 또 있었다.

집안도 직업도 얼굴도 다 최상급(?)이었다.

나와의 첫만남에서도 내게 호의적인 언어와 행동이 충분했음에도 마음이 기울지 않았다.

'다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 왜 나같은 여자를....'

그시절엔 '사'자가 붙는 직업엔 대놓고 열쇠를 요구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했고 나 스스로에게도 자신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괜히 거절하기 위하여 서로의 집안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치부했다.

하얗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얼굴에도 자신이 없었다.

그시절엔  잘 생긴 남자의 얼굴에 대하여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기에.

아마도 아버지들의 행동이 그랬던 시절이었으니 딸들의 마음속에도 깊이 뿌리를 내렸을터이다.

그 남자에 대한 나의 마음을 완전히 접고서 남편을 만났기에 설렘과 기대를 가질수 밖에 없었으나 남편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그 틈새를 비집고 남자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가 그 손을 뿌리쳤다.

언니들과 합세하여 내 마음을 돌리려 하시더니 단번에 거절해 버리셨다.

엄마의 그런 결정을 쳐다보며 결혼의 때가 아닌가보다 포기해 버릴 즈음에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은 더 보고 싶은 마음과 차갑게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었지만 양가의 어른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첫만남보다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말을 걸었고 나를 만나기전 학교에서 배구를 하다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맞선자리에서 어정쩡했노라며 2주동안은 학교에 일이 많아서 집에도 오지 못했다는 변명을 해 주었다.

남편은 통영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편과 만남이 시작 되었고 나의 인생에 새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회갑이 8월이라고 결혼을 재촉하셨고 집을 떠날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7월17일 제헌절, 전국민이 쉬는 날 나의 인생 2막을 위한 새출발이 시간의 턱에 닿아 있었다.

아버지로 부터 전해들은 남편의 아버지,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인품은 훌륭하셨고 "가정도 따뜻하니 니만가서 잘하모 된다."

짧고 굵은 조언이 결혼을 준비하는 마음에 안심은 되었지만 며칠전에 남편될 사람에게서 들은 말은 삼켜야 했다.

엄마가 신랑예물 하라고 준 돈으로 남편에게 시계와 반지를 나는 반지하나를 맞췄다.

이미 선택되어진 인생은 내 몫이었다.

대학 재학중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남편의 집은 아버지와 함께 모든것을 다 잃었다고 했다.

대출을 받아서 결혼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야 한다기에 빚을 지고 시작할 수는 없다며 내가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받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하게 말했었다.

남편의 가정이 생활에 필요한 물질들은 부족했지만 남편에게 있는 온기를 믿었다.

아무튼 기웃둥거리며 진행된 결혼식이 준비가 되었고 드디어

그날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멀고도 넓은 광야를 향하여 결혼행진곡에 발을 맞추며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나의에세이 #앤의에세이 #글쓰기

#결혼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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